'윤세징 일가 묘역 및 석물' 위치 및 지정 범위
본지 2025년 3월 13일 3면과 2025년 6월 19일 3면 기사에 두 번 소개되었던 파평 윤씨 판서공(휘 세징)파 종중(이하 '세징파 종중'이라 한다)의 입향조인 윤세징과 그 두 아들의 묘역, 그리고 여기에 설치된 석물 25점이 포천시의 새로운 유형 향토 유산으로 공고를 통해 정식으로 지정받았다. 세징파 종중에서는 2024년에 이어 2025년 2차에 걸쳐 이 묘역에 대한 향토 유산 지정 신청 후, 2025년 12월 11일 심사에서 '조건부 동의'를 받아 이를 보완한 후 천신만고 끝에 조상님들의 묘역을 좀 더 잘 보전할 수 있는 큰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2026년 2월 24일 포천시 공고문에 의하면 위의 사진1에 보이는 다섯 분의 분묘가 군락으로 조성된 중 1, 2, 3번으로 표시된 각각 윤세징, 윤이익, 윤이제의 분묘와 그에 설치된 석물들을 새로운 '포천시의 유형 향토 유산'으로 특정하였다. 주소와 넓이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용정리 192-1번지 내 1915m²이다.
포천 군내면 용정리에서 세거해 온 파평 윤씨 세징파 종중
세징파 종중은 파평 윤씨 23세 윤세징(尹世徵:1595~1631)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사위로 이번에 향토 유산으로 지정된 군내면 용정리 일대에 1600년대 초에 입향한 이래 400년 이상 이곳에 세거하고 있다. 윤세징의 조부는 '파평 윤씨 판도공후 부윤공파'의 후손으로 광해군 때 공조판서를 지낸 윤국형이며, 생부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윤경립이고 양부는 요절하신 예립이다.
세징의 아드님 두 분 중 둘째인 윤이제가 숙종 때 어영대장,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 최고의 반열에 오른 후 아버님이신 윤세징의 묘소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의 명장들에게 부탁하여 아버지인 윤세징과 형인 윤이익의 묘갈과 다른 석물들을 설치했고, 윤세징은 묘갈이 처음 건립된 1684년 이후에 '증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이에 이곳에 세거하던 소 종중의 종친회는 그의 추증된 관직과 휘를 따라 '파평 윤씨 판서공(휘 세징)파 종중'이라 명명하여 종중명을 지었다고 알려졌다. 파평 윤씨의 방파 중에 '판서공파'가 있어 종중 명에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이들은 '파평 윤씨 판도공후 부윤공파'의 후손들로 포천에 세거하는 소 종중이다.
파평 윤씨 세징파 종중의 대표적인 인물들
파평 윤씨 세징파 종중의 입향조는 백사 이항복의 사위로 잘 알려진 23세 윤세징(尹世徵:1595~1631)에서 시작됐다. 그의 큰아들인 24세 윤이익(尹以益, 1616~1689)은 나주 목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인 24세 윤이제(尹以濟, 1628~1701)는 문과에 급제 후 어영대장, 한성부 판윤, 네 번의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낸 포천이 낳은 대표적인 조선 중기, 특히 숙종의 총애를 받은 고위 관료였다.
25세 윤기경(尹基慶, 1669~1726)도 문과에 급제 후 진주 목사를 지냈고, 26세 윤사완(尹師完, 1671~1726)도 문과에 급제했다. 호조 참판을 지낸 27세 윤필병(尹弼秉, 1730~1810)은 1767년과 1786년 두 차례 문과에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선치를 했고, 특히 '한시의 명장'이라고 전해진다.
윤세징은 조부와 생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가 포천에 입향한 이후 직계 자손들이 24세에서 27세까지 4대에 걸쳐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16명 이상의 소과(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했음에도 상당히 조용히 지낸 가문이라 평가할 수 있는데, 윤세징 자신은 한창 공부할 당시 집안에서 이괄의 난과 연관된 자가 있어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한성재판소 판사를 지낸 윤경규(尹庚圭, 1840~), 윤방현(尹邦鉉, 1878~1933)이 있고, 포천초등학교를 설립한 윤흥순(尹興淳, 1884~), 포천에서 제2, 3, 4대 국회의원을 지내시고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윤성순(尹珹淳, 1898~1971) 등이 종중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대표적인 석물 및 그 안에서 발견되는 우수성
심사 위원들은 종합적인 '심의 의견' 난에 “윤세징의 묘역은 근기 남인 중 핵심적인 가문의 모습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가졌으며, 묘갈 및 석인상은 17~18세기 경기 지역 사대부 분묘에서 발견되는 특징이 잘 남아있다“라고 평가했다.
1) 윤세징과 윤이익의 묘갈에 기록된 건립 연도에 숭정 정축년(1637, 인조15)을 기점으로 삼고 「崇禎丁丑年後 四十七年(숭정정축년후 사십칠년)」 「崇禎丁丑年後 五十五年(숭정정축년후 오십오년)」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는데, ‘숭정 정축년’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항복을 한 해이다. (본지 2025년 3월 13일과 6월 19일 기사 참조)
비석의 건립 연도 기점을 「崇禎丁丑年」으로 삼은 것은 아주 특이한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명나라 숭정제의 연호(1628~1844)를 따라 1628년을 기점으로 ‘숭정후(崇禎後)~’로 표기하고 있는데, 정축년의 치욕적인 사건을 굳이 기점으로 기록한 것은 1684년(숙종10)에 윤세징 묘갈의 글을 짓고 쓴 이관징(李觀徵)과 1692년(숙종18)에 형인 윤이익 묘갈의 글을 짓고 쓴 동생 윤이제(尹以濟)의 확고한 숭명배청(崇明排淸) 사관에서 비롯한 것이라 판단된다. 특히, 윤이제의 스승인 이민구(李敏求)가 병자호란 당시 정축년에 겪은 치욕에 대해 가르침과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2) 윤세징 묘갈은 고위층 관료이자 해서체의 명가로 잘 알려진 예조판서를 지낸 이관징이 글을 짓고 아울러 글씨를 썼다. 이관징이 해서체로 쓴 포항시 경주 손씨 묘비와 대전시 동구 송기수의 신도비는 이미 도 지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윤세징의 묘갈은 '글을 짓고 아울러 글씨를 쓴(撰幷書, 찬병서)' 아주 귀한 사례라는 점에서 금석문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3) 윤세징의 묘갈은 17세기 이수 방부형의 대표적인 명품으로 이수와 비신이 일체형으로 그림 2에 전후 면의 사진과 상세 스케치를 보인다. 전면에는 쌍용이 마주하고 중앙 상단부에 있는 한 개의 여의주를 좌측에 새겨진 용이 4조(四爪, 네 개의 손톱 또는 발톱)로 감싼 형태이다.
자세히 살피면 좌측 용의 귀 위에 뿔이 새겨져 있어 수컷 용임을 알 수 있다. 우측의 용은 암컷 용을 새긴 것이다. 좌우 측면에는 구름 속의 용미(龍尾)를 조각하였다. 전면에 구름 문양이 없이 용의 몸통으로 꽉 채워져 있지만, 후면에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 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중앙 상단부에 달무리 속의 보름달이 새겨진 점은 아주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전체적으로 왕족의 묘갈에 조각된 이수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기사환국으로 고위 권력층에 있던 아들 윤이제(尹以濟)가 당대 최고의 명장(名匠)을 동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미술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될 석조 유물이다.
그림2. 향토 유산으로 지정된 윤세징 묘갈의 전후 면 사진.
이 묘갈의 후면에 새겨진 구름에 보름달이 추가된 형상은 아주 희귀한 것이며 전체적인 조각이 아주 세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묘갈 자체의 석질이 치밀하고 아주 상품이라 가능했다는 현장을 방문한 심사 위원의 평가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참고로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소재한 왕족이신 인흥군(仁興君)의 이수 방부형 묘갈에도 전면과 후면에 두 마리 용이 서로 여의주를 쟁취하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인흥군의 묘갈은 1986년도에 포천시의 향토 유적 제2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2년도에 경기도 기념물로 승격되었다.
4) 포천 지역 여타 묘소의 석물들과 비교와 분석을 했을 때 윤세징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문인석의 조형성과 예술성 또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술성에서 문인석 얼굴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조각 기법은 묘주인 윤세징과 동시대 인물이며 왕족인 인평대군 이요의 묘역 문인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전문가의 평가가 있었다.
두 문인석은 조각 기법이나 기술 면에서 양관과 조복, 폐슬, 후수 등 복식의 표현 양식이 유사한데, 세부적인 표현이나 조각의 마감에서 윤세징 묘 문인석의 표현이 조금 더 정갈하고 정교하다고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입꼬리가 내려져 안면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인평대군 묘 문인석에 비해 윤세징 묘의 문인석은 그림3에 보이는 바처럼 온화한 미소에 이목구비를 해학적이면서 생동감 넘치도록 표현하였다. 특히 바람에 날리는 듯한 턱수염까지 구현한 조각 기법이 탁월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가 있었다.
동자석도 양관 조복을 착용한 형상으로 조각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쌍각 형태로 머리를 묶은 아들인 윤이익의 묘에 설치된 동자석과 구별되어 심사 위원들에 의하면 '소문인석'이라 분류하기로 하였다. 17세기 고위 관료층의 묘역에서 흔하지 않게 나타나는 양상을 윤세징의 묘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도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3. 윤세징 묘역의 왼쪽(동쪽) 문인석 사진.
포천시 향토 유산으로 '윤세징 묘역 및 석물'의 향후 보존책
최근에 세종-포천 간 고속도로 개설과 용정산업단지의 조성으로 4백여 년간 파평 윤씨 세징파의 세거지로 알려진 용정마을과 그 한가운데 위치한 '윤세징 일가 묘역 및 석물'의 보전이 상당한 어려움에 부닥친 상태였다. 하지만 향토 유산 지정 신청을 위한 학술 조사의 결과를 거쳐 '윤세징 일가 묘역 및 석물'이 우리 포천 시민 및 파평 윤씨의 후손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우수성과 중요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고, 심사 위원들이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종중에서는 포천시, 포천 시민 모두와 함께 포천시의 유형문화유산 지정의 기쁨을 함께하고, 이 과정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포천시와 협조하여 후손들에게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남기겠다는 각오를 보였음을 알려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