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덴버의 컨츄리 음악 'Take me home country road' 가사 첫 부분에 나오는 가사 '...블루리즈 마운틴 셰난도아 리버..."에도 셰난도아 국립공원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국엔 수백 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사진 한 장만으로도 동공이 확 열릴만한 진기한 풍광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이 많지만, 장거리를 불사하고 가볼 만하다기보다는, 자연환경 보존의 목적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는 곳들도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자동차로 두세 시간 떨어진 버지니아주, 애팔래치아 산맥 가운데 블루리지 마운트에 위치한 셰난도아는, 사진 한 장으로 먼곳의 방문객을 불러들일 풍광은 없는 국립공원이다. 미국의 자연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엄한 대자연의 그랜드캐니언, 옐로스토운, 브라이스캐니언 등을, 예전에 서부에서부터 동부로 자동차 타고 이사 오면서 이미 섭렵한 우리에게도, 셰난도아는 경관이 대단할 것은 없는 수준이다. 가볼 만한 곳이 너무 많던, 신묘막측한 풍광이 펼쳐진 칼리포니아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후엔, 타지에서 손님이 오셔도 마땅히 구경시켜 드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10여 년 전 쯤, 한국에서 오신 손님
▲코로나 덕분에 가장 좋았던 것은 야외 콘서트를 진행한 것이다. 야외 콘서트를 몇 번 진행하려다 형편상 진행하지 못했는데, 코로나는 덕분에 실행하기로 했다. 실내보다 실외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해주세요.” 미장원에 갈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오래도록 짧은 커트 머리였다. 그 이전에는 단발머리였다. 파마를 한 것은 20대 초반에 한 번, 30대 후반에 한 번뿐이었다. 30대 후반에 파마를 하고 그대로 머리를 길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긴 머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때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생소하다. 지금 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미장원에 간 것이 꽤 오래됐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미장원을 딱 한 번 갔다. 커트 머리가 길어져 더 견딜 수 없을 때 달려갔다. 이렇게 질끈 묶고 얼마를 지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태로 잠시 더 있어 볼 예정이다. 옷도 한 번 사러 가지 않았다. 있는 옷도 많다. 시골에 살면서 옷 욕심은 더욱 없어졌다. 차리고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두 벌로 한 계절을 난다. 생필품은 대형마트에 가서 남편이 사 온다. 책방을 하고 있다는 핑계로 나는 통 나가지 않는다. 봄여름 계
조합장은 우리 사회를 옳은 길로 이끄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오르는 자리다. 특히 포천에서는 그렇다. 산림조합장이나 농협조합장들, 그리고 축협조합장은 포천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는 훌륭한 분들이다. 그들이 폐기물을 불법으로 처리해 포천 시민의 지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개성인삼조합은 그리고 조합장은 자신의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창피하고 부끄럽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놨더니 국회는 벌써 몇 달째 누구 아들의 군대 휴가 이야기로 날이 새는지 모르고 있다. 해명은 오해가 되고, 또 그 오해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이제는 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도 모르게 됐다. 누구 아들의 군대 휴가 문제가 이렇게 세상을 뒤엎을 일이라도 되는가. 상식으로 판단해도 될 일을 죽기 살기로 물어뜯고 난리를 쳐대니 이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이 오히려 민망하다. 공무원이 월북하다가 북한군에게 총살당해 화형에 처해 졌다는 뉴스로 나라가 또 시끄럽다. 대한민국 군대는 무엇을 하는 군대인가. 그런데도 북한 통치자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례적 반응’이라며 감읍이라도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
하버드대학의 심장병 전문의 허버트 벤슨 교수의 《약 없이 고혈압 이겨내기》와, 워싱턴대학의 당뇨병 전문의 닐 버나드 교수의 《약 없이 당뇨병 이겨내기》 등을 통해서 고혈압, 당뇨, 심장병 등이 평생 약을 써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절식, 운동과 휴식, 스트레스 조절과 같은 단순한 생활요법만으로도 완치될 수 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낸 유태우 박사의 저서 《질병 완치》의 표지에는 “평생 약을 먹겠는가? 질병을 완치하겠는가?” 라는 부제목이 쓰여 있다. 일평생 약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많은 환자, 그리고 평생 약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의사들은 이 물음을 놓고 한 번쯤 잘 생각해 보면 좋겠다. 유 박사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몇십 년 동안 많은 환자에게 약을 쓰는 치료를 해 오면서 병이 낫지 않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 왔다. 왜 낫지 않는지 살펴보았더니, 약물치료가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결과(증상)만 치료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 박사는 “건강진단을 믿지 말라. 병원을 믿지 말라. 병의 원인을 치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대구의료원 신경외과장을 지낸 황성수 박사의 저서 《고혈
Tara, Home! I’ll go back home!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내 고향, 타라로 가자 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 남북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란 미국의 여류작가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은 1936년 불후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펴낸다. 그녀의 나이 36살 나던 해이다. 25세의 무명작가가 10여 년에 걸쳐 쓴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미국에서만 150만 부가 팔린 당시 초 베스트셀러다. 역사소설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한때 이 소설은 미국인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영화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타라(Tara)’역을 멋지게 해낸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의 덕도 많이 봤다. 이 작품은 1939년 영화로 제작되어 작품, 감독, 여우주연상 등 아카데미 9개 부문의 상을 휩쓸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 당시에도 한국어 번역판이 나오긴 했지만, 소
참 곱기도 했다. 그 어떤 홍보석보다도 더 굵고 아름다웠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고 여러 개가 무리 지어 뽐내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 말고도 몇 사람이 더 그 홍보석들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것은 주택가 담장 밖까지 나와 익어가는 새빨간 석류였다. 가지가 휘어져 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마치 붉은 꽃다발처럼 느껴졌다. 그 중의 몇 개는 알밤처럼 껍질이 벌어져 속에 있는 석류알들이 루비처럼 보였다.삭막한 서울 도심의 주택가에서 그처럼 귀한 보석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며칠 전 남산자락의 후암동 주택가를 지나다 그 석류들을 보았다. 그곳은 아직도 일본식 목조가옥들이 많이 남아있다. 남산으로 이어지는 상당히 경사진 주택가의 골목은 매우 좁아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다. 그 경사진 골목길을 지나다 빨간 석류들이 주렁주렁 달린 집을 본 것이다. 넓지 않은 마당에서 자란 석류나무는 수령이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밑 둥이 굵은 데다 무성한 가지가 높이 자라 지붕 위까지 뻗어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담장 너머 밖에까지 나와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꽃나무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기온이 높아지면서 추위에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 내 안에 든 생각이 있다. 모름지기 나와 인연이 된 모든 이들이 적어도 떠난다는 기미(幾微)만이라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별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은.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을 가지 않는다. 개인 병원이든 종합병원이든 병원에 들어서면, 언제나 온갖 만감이 교차하여 몸과 마음을 어지럽혀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져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친구들 가운데는 유난히 병원 출입이 잦은 친구가 있는데, 나의 이런 병원 기피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빈축을 하는 일이 만만찮게 있다. 10년 전쯤인가, 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심장 압박)였는데도 병원을 가지 않는 것에 혀를 차던 나의 친구가 그가 다니던 병원에 예약(심혈관 내과)해놓고 갑자기 나를 불러 진료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의사가 나를 보고 너무 위험하여 당장에 심혈관 시술을 해야 한다 했는데, 그날이 금요일 오후 병원이 끝날 무렵이어서 월요일 오전 입원해 시술 일정을 잡아 스텐트 시술을 한 일이 있다. 그때 한꺼번에 3개를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X-ray 사진을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동농문학’ 제5집을 보기 전까지 이해조 선생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동농이 무엇을 했던 분인지, 또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인지조차 몰랐으니까. 그러다가 지난 8월쯤인가 대진대 이병찬 교수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놓은 출판을 앞둔 원고 더미를 들춰보다가 동농 이해조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났다. 동농 이해조 선생-. 지금부터 150여 년 전, 고종 때인 1869년 포천에서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이해조 선생은 그 시절에는 드물게 언론인으로 활약했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소년한반도',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과 ‘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했다. 그는 또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의 첫번째 기자이기도 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 사건'을 주도한 현진건이었다. 이해조 선생은 또 1906년 소설 '잠상태'를 발표했고,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 발표한 작품 ‘자유종’을 비롯해 '옥중화', '강상련', '연의 각', '토의 간' 등 40여 편의 신소설을 발표한 작가였다. 이와 함께 포천 최초의 학교라는 청성제일학교를 설립했던 교육자이기도 했던
현대 의학의 많은 의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혈압이라는 증세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혈압이란 병이 아니고 생체의 자기치료법이다. 피가 맑고 혈관이 깨끗하여 탄력성이 있으면 혈압을 높일 필요가 없을 텐데, 피가 탁해지고 혈관 통로가 좁아지면 어쩔 수 없이 심장과 혈관은 피를 전신에 흐르게 하기 위해 혈압을 높이는 자기치료법을 써야만 한다 현대 서양의학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증세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나 열, 통증 같은 증세들을 병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증세를 없애는 것을 치료라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설사에는 지사제를, 열이 나면 해열제를, 통증에는 진통제를 쓰는 것과 같은 처치를 당연한 치료법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증세라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패한 음식을 먹게 되면 복통이나 구역질, 설사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 설사란 부패한 음식이 위장관으로 들어오면 세균이나 독성으로 우리 몸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런 부패한 음식물을 빨리 몸 밖으로 배출시켜 우리 몸을 보호하려고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치료법인 것이다. 대부분의 증세란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그것을 바로 알고 그 증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한 고슴도치는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이름 붙였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의 가시가 동료들을 서로 찌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너무나 아파 곧 흩어지지만,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다시 모여든다. 가시가 서로를 찌르면 금방 흩어졌다가 또 모이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들은 상대방의 가시에 찔리지 않을 적당한 거리를 알아낸 것이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서로 몸을 기대 온기를 나누려 한 고슴도치는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고 이름 붙였다. 고슴도치들은 결국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적의 거리(Optimum distance)’를 찾아낸 것이다. 이 과정에
5년 전 내 딸의 결혼식 때 나는 친구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그는 그날 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며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후 두어 차례 안부 전화가 오갔고, 다른 사람의 길흉사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길흉사엔 성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일일이 부고를 하기가 어려운 흉사와는 달리 결혼식은 꼭 청첩장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첩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이 언제인데?” “다음 주일이니 열흘 남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일종의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중요한 일에 초대할 대상도 안 되는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인 사람’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오래전 젊었던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그 스쳐 가는 일들 속에 나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은근히 화가 치민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남자들끼리의 모임이었으니 당연히 술잔들이 오갔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날 정말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
아버지의 서거(逝去)로 내가 받은 충격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때의 일기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막힌다. 어찌해서 그다음 날도 해가 뜨는지, 어찌해서 세상이 그대로 존재하는지, 납득할 수 없기에 내 가슴은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버지의 급서(急逝) 비보를 접한 것은 대학 2학년을 막 올라와서였다. 3교시 수업을 하던 중 학생과로 연락이 왔는데 급히 달려가 전화를 받았더니, 사환 학생(아버지가 고교 공부를 시키던)이 울먹이면서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아서 벌컥 장난하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그 아이가 엉엉 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아침에, 나의 등교와 거의 같은 시간에 아버지는 병원(당시는 아버지 병원이 종로5가에 있었음)으로 가셨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병원에는 간호사도 있었고 급할 때 쓰는 구급약도 있었는데 이것이 말이 되는가. 내가 알기로는 아드레날린(당시 일반 병원에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의사협회 총무였기 때문에 우리 병원에는 이 약이 구
건국한 지 300년이 채 안 된 신생국 미국이 현대사의 주인공이 되어 버티고 서있는데, 그 나라 연방정부의 행정수도 외곽에서 35년째 살면서도 서울 사람들이 남산 안 가듯, 위싱턴DC 도심에는 관공서에 볼일이 있거나 외지에서 오는 손님 접대차 원이 아니면 별로 드나들지 않고 살아왔다. 오래된 도시라서 우선 주차가 불편하고 이민자로 살아내느라 급급하여 미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숨 가쁘던 일상이 은퇴로 인해 여유가 생기게 되니 역사와 문화 등 인문학에도 관심을 두게 되고, 바로 옆에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도시가 있다는 것도 요즈음 알게 되었다. 굳이 비행기 타고 시간대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비싼 여행경비 들여가며 구경하러 가는 도시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많은 면에선 오히려 파리, 런던, 뉴욕 등의 도시들보다 훨씬 우월한 관광지임을 절감하며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 이 아름다운 도시를 재발견하는 중이었다.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일정 지역에 영웅이나 천재들이 모여 있으면, 역사는 커다란 전환점을 돌게 되는 것 같다. 삼국지는 고대의 이야기지만 군웅이 활거하며 중원의 역사를 주무른 이야기로 수천 년 지난 요즘도 필독서로 자리하고 있
하늘이 파랗다. 너무 맑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40일이 넘는 긴 장마가 끝나니 태풍이 연이어 왔다. 장마 때 폭우로 부서진 집을 수리하는 중인데 자꾸 멈춘다. 바로 어제도 폭우가 쏟아졌다. 집 공사는 그래서 자꾸 멈춘다. 코로나19와 긴 장마, 폭우, 태풍.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수도권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자 그나마 뜸하던 책방의 발길은 뚝 끊겼다. 코로나19 감염 걱정으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된다. 오늘 오전에는 갑자기 성인 남성 4명이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저, 어떻게 오셨어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들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지금 커피 되나요?” 이런! 한동안 손님이 없다 보니 그만 내가 책방과 카페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것이다. 근처에 볼일을 보러 왔다는 그들은 책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책은 읽기 싫은데 책 있는 데 오니까 좋네.” 이 책 저 책 열심히 살펴보길래 나는 기대에 차서 그들 중 하나라도 책 한 권을 집어 계산대로 갖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희 밖에서 커피 마시고 갈게요.” 흠! 결국
유럽엔 왜 태풍이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유럽은 태풍이 생기지 않는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태풍은 열대성 저기압 중 풍속이 강한 폭풍우이므로 태풍이 만들어 지는 곳은 대부분 서태평양이나 남중국해이다. 유럽이 태풍과 같은 피해가 없는 것은 내륙지역이어서 큰 바다가 근접해 있지 않고 위도도 높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태풍(Tempest Op. 31-2)> 3악장은 요즘처럼 태풍이 줄이어 몰아칠 때면 한 번쯤 들어볼 만한 걸작이다. 피아노 건반 위에 금방이라도 광풍이 불어올 듯 장엄한 선율이 울려 퍼져 일순 무아의 경지에 말려든다. 전 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곡을 이해하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를 먼저 읽어보라”고 베토벤이 귀띔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1770년 12월 그가 태어난 나라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에도 태풍(The Tempest)이라곤 없었고 지금도 없다. 태풍은 7~10월 사이에 주로 북태평양 남서부와 아시아 쪽 해상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의 하나인데, 한자 이름 태풍(颱風)의 영어식 발음인 ‘타이푼(Typhoon)’으로도 통한다. 베토벤이 출생한 독일의 라인(Rhine)강 상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