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신냉전 시대에 6.25 전쟁과 포천을 생각한다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프로듀서, 아나운서

 

 

불행한 역사, 다시 없어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존의 경제, 외교 글로벌 네트워크를 깨고, 미국-EU를 축으로 한 서방세계와 중국-러시아를 축으로 하는 이른바 반미, 비서방 세계가 대립 갈등하는, 소위 ‘신냉전’ 시대를 공고히 하는 데에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또 3년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펜데믹이 이 신냉전 시대의 도래를 앞당긴 것으로 진단한다.

 

우리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이념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정치 외교적으로는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구 민주 세력과 소련, 중공을 주축으로 한 공산 세력과의 극한적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6.25 전쟁이라는 참극을 겪고 휴전하여 지금의 남북 분단의 비극적 상황에 이르고 있다.

 

만약에 앞에서 전제한 작금의 상황이 신냉전 기라는 진단이 맞는다면, 우리가 글로벌 차원에서 동아시아 지역을 넘어 서방 블록에 참여하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됨으로써 세계적 갈등과 대립, 그 격랑 속에 또다시 휘말리는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이가 있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 3년은 대한민국, UN군, 북한 측, 중공군 모두 합하여 560만여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세계적 참극’이었다. 남한 측은 민간인, 군인 모두 사망 50만여 명, 부상 67만여 명, 실종 40만여 명, 모두 합해서 총 160만여 명, UN군은 15만여 명, 북한 측은 350만여 명, 중공군은 36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은 2014년에 시작되어 2022년에 전면전으로 확전되어 우크라이나인이 이 전쟁으로 15개국이 넘는 국가로 800 만여 명 이상이 피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최소 수백여 명의 난민이 입국했다.

 

전쟁은 소수 전체주의, 국가주의를 추종하는 망나니 같은 집단이 탐욕을 채우기 위해 기획 연출, 역사라는 무대에 올려진 참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관계없는 수많은 사람을 조연으로 출연시켜 희생시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과거 소련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구소련의 영역이 자신의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옛 소련 우방국들은 물론 구성국인 우크라이나 등이 NATO에 가입하자 선제공격하여 일어났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패권 경쟁 속에서 대만, 북한 등과 더불어 매 순간순간 각기 주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 위에 놓여 있다. 향후 벌어질 신냉전의 소용돌이에 우리가 어떻게 휘말릴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극한의 냉전 상황에서 희생양이 되었던 한반도, 이 위험한 신냉전 기의 격랑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주목하여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모두의 의견을 모아 현명한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의 자존과 안전을 지킴은 물론 세계 속에 한층 도약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주역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방 전후- 6.25 전쟁까지의 역사가 주는 엄혹한 교훈

 

소련은 일본 패망이 거의 확실해진 1945년 8월 8일 밤 자정,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8월 11일 연해주에서 만주로 진격한 다음 압록강을 넘어 작전 지역에 포함된 한반도로 향한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9월 초, 분할 점령 지역인 38선 이북 전 지역을 점령한다.

 

한편 일본 미군은 8월 11일에 남한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8월 22일 만주 대부분을 점령하며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쪽으로 전진하는 소련군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일본에서 한반도로 진격,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38선이 한반도를 동서로 하는 남북 분단 경계선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일본이 패망하여 우리가 광복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은 이미 그 이전에 취해진 조치였다.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이 끝난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상 회의를 열어 ‘한국은 정부수립 능력이 없으므로 5년간 미 · 영 · 중 · 소 4개국이 신탁 통치한다’라는 결정을 한다. 신탁통치는 강대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일정 기간 대신 통치해 주는 것을 말한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 신탁통치 결정이라는 일련의 행위로 보아 38선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 분할은 이미 미소를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암묵적 약속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탁통치 결정이 나오자 한반도의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북쪽이 갑자기 찬성으로 태도를 바꾼다. 남쪽은 분열이 다소 있었으나 반대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한반도는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이념과 신탁통치 찬반으로 대립하게 됨으로써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대립, 신탁통치 찬반 대립, 남북한 내부의 지도자 간 알력, 미소라는 남북한 군정 체제의 대립과 패권 경쟁-온통 대립과 갈등이 뒤범벅된 혼란의 한반도!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세계적 참극-‘6.25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남북 분단의 3.8선, 그리고 6.25 전쟁과 내 고향 포천

 

미국은,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가면 우리의 항일 독립운동과 동포의 이주, 정착을 도와준 소련에 대해 조선인이 비교적 우호적이고, 영토까지 이웃해 있어 자연스럽게 우리 한반도가 소련 영향권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약 한반도가 소련 영향권으로 들어가면 일본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렇게 될 경우, 부동항(얼지 않아 해양 진출이 자유로운 항구)이 없던 소련이 한반도를 영향권에 넣고 조선과 일본 인근 해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진출, 엄청난 세력을 키울 것이고, 그것은 미국에 좋지 않은 일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1945년 당시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남북분할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유추해본다. 어떻든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이 분단되는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한스러운 38선은 공교롭게도 포천시의 창수면, 영중면, 일동면을 동서로 지나가게 됨으로써 우리 고향도 남북으로 나뉘는 신세가 되었다.

 

미군이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하자 바로, 북한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남한 침략의 승인을 받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다음 해인 1950년, 소련의 핵무기 실험, 중국 본토의 공산화가 성공하자 남한 침략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공격을 시작한다.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포천과 인근 주변의 3, 43, 37번 국도를 통해 잘 훈련된 인민군대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남으로 진격, 포천, 의정부를 바로 점령하고 서울을 공격한다. 내 고향 포천의 6.25 전쟁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포천은 국민의 이해와 위로, 국가의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6.25 전쟁 이전의 포천은 유서 깊은 많은 종가가 있고, 지천으로 귀한 문화재가 있으며 선현의 빛나는 얼과 지조 높은 선비 정신, 유교 문화가 살아 숨 쉬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곳이 대부분 지역은 접경지대가 되고, 전쟁터가 되어 유무형 문화유산이 훼손되고 얼과 정신, 아름다운 정서가 단절되었으며 사람과 마을마저 사라지거나 흐트러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포천 땅은 몇 번의 공방을 거듭하는 전투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북측 지역이 수복되어 원래 포천의 모습은 되찾았으나 전쟁의 깊은 상흔은 치유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 있다.

 

포천은 6.25 전쟁이라는 한반도의 비극에 손상되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대부분 지역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의 주요 지역에는 6.25 전쟁에 참여한 UN군이 오랜 기간 주둔했고 엄청난 규모의 우리 군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지역 대부분은 군 주둔지로, 훈련장으로, 군 시설 보호 구역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포천시는 제대로 된 도시 발전계획을 수립, 시행하지도 못하고, 시민들의 주거, 복지, 교통 등 환경도 조화롭게 조성하지도 못하는 절름발이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들은 기본적인 재산권 행사에도 많은 제약과 불이익,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포천 사람들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 받기는커녕, 말도 못 꺼내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아픔’을 ‘미덕’ 삼아 그 오랜 세월을 묵묵히 참아왔다. 그리고 해군기지가 들어선 제주도 강정마을, 사드 기지가 들어선 경상북도 성주 등이 정부의 엄청난 혜택과 예쁨(?) 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아픔이 더욱 깊어만 갔다.

 

보훈의 달과 6.25 전쟁 일을 맞아 포천의 아픔과 헤아릴 수 없는 박탈감이 폐부를 찌른다. 전 국민의 이해와 위로, 그리고 포천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국가의 적절한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포천시민들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요구하고, 포천시와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 등과 더불어 슬기롭게 쟁취해야 한다.

 

 

 

서재원 이력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등학교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