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원 칼럼] 살며 생각하며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요?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프로듀서, 아나운서

 

 

걱정거리 없는 건강한 무료함이

오히려 일상의 행복

 

모처럼 무료한 주말이다. 걱정거리도 없고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가볍다. 산책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원에 나가니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산책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공기가 상큼하다. 이른 봄이라서 가로수에는 아직 움이 돋지 않고 있다. 공원 잔디밭 공터에 있는 냉이들은 찬 기운이 감도는 시퍼런 하늘을 향해 씩씩하게 솟아오르려다 찬바람에 주눅이 들었는지 보라색 날개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이가 들었나 보다. 오십 대에는 좀체 하지 않던 산책을 하고, 길가의 가로수를 찬찬히 쳐다보기도 하고, 땅에서 자라나는 냉이, 꽃다지도 들여다보게 된다. 주위 환경이나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두기도 하는 것이다.

 

삼사십대에만 해도 오늘 같은 주말이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서 기껏 술을 먹거나 시내를 헤매기 일쑤였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즐기거나 혼자 건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몸을 들썩이며 불안해하기까지 했다.

 

1990년대에 복지나 교육이 괜찮다고 하는 나라로 이민을 가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사는 후배가 있다. 큰 볼일이 없어도 이삼 년에 한번은 귀국해서 연락해와 만나는 사이이다. 소주 한잔 기울이며 하는 대화 중 이런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다.

 

글쎄 내가 사는 곳은 말이에요, 동네가 얼마나 무료한지 일 년 내내 우리나라처럼 보도블록 하나 교체하는 공사를 안 해요. 몇 년이 가도 집을 부수고 새집을 건축하는 것도 볼 수가 없어요. 걱정은 없지만 답답하고 심심할 정도로 무료합니다.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동네 분들이 지나가고, 예를 들면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같은 부부가 손을 잡고 똑같이 교회를 가고......

 

또 유럽인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한 어느 분의 이야기를 간접으로 들은 이야기이다. 모국의 평안함, 안정감, 종교적 삶, 단순한 일상성, 건조한 인간관계와 비교해서 한국의 적당한 번잡함, 발전을 위한 변화, 인정 있는 인간관계, 반전이 있는 삶 등이 좋아 귀화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힘을 기르고 권모술수를 부리며 변신해야 하는 삶,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나의 것으로 만들거나 내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삶, 늘 일에 치어 쉼 없이 달려가는 삶에 익숙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걱정거리 없는 평안함과 단순한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행복인 줄 모른다. 느닷없이 그것이 찾아와 계속되면 가치와 즐거움을 크게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걱정거리 없는 일상의 행복은 그리 흥분되거나 극적인 느낌을 주지 못하고 밋밋한 무료함을 줄 수 있다. 마치 건강하고 깨끗한 물과 공기에서 감미롭고 매혹적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번잡하고 바쁘게 살아온 우리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신선하고 건강한 물을 먹어야 하는 때에 미각을 높이는 첨가제를 넣은 음료수만을 찾다가는 건강을 잃는다.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어느 구석 없이 행복한 사람이 더 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모험과 위험한 도전을 시도하다 불행의 나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건강과 공기는 잃은 뒤에야 소중함을 안다고 했다. 소중한 줄 모르는 행복은 그만큼 잃기가 쉽다. 잘 지켜야 할 것이다.

 

 

행복은 목표가 아닌 목적

삶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

 

행복은 목표가 아닌 목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일의 행복을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고,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아주 오랫동안 그와 같이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큰 착각이고 잘못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삶의 목적이다. 쟁취하고, 성취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층 차원 높은 행복은 깊이 느끼고, 기쁘게 생활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에서 나온다. 그것은‘지금 하는 일, 소유한 것,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꺼이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상의 행복이란 필자의 시를 소개한다.

 

 

일상의 행복

 

아침에 일어나 창밖에 보이는 꼭 같은 풍경들

늦은 밤, 평안하게 잠든 우리 식구 모두

주일이면 손잡고 어김없이 지나가는 앞집 부부

나를 지루하게 한다.

 

춘삼월 십 년 넘게 춘란이 선사하는 보춘화

사월이면 어김없이 보여주는 마흔 살 군자란의 꽃대궁

매년 피고 지는 봄꽃들 감흥이 없다

 

주말에 누리는 걱정 없는 이불 속의 여유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안녕이 행복인 줄 모른다

 

 

사랑에서 오는 보다 큰 행복

 

성경 등에 등장하는 이타적이고 절대적인 종교적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이다. 노래 가사로 쓰이기도 하는 성경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사랑이 그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성경 등의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합일을 지향한다.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사랑을‘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로 정의한다.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위의 사랑은 성경이 인간 행위의 영역을 계도 하는 것이지만 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역, 신의 영역인 사랑이 있다. 절대적인 종교적 사랑에는 일반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무거운 짐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사랑’은 젊은 청춘남녀들이 이성 간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나 성적으로 좋아하는 것, 즉 애정 행위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대단히 폭이 깊은‘ 인간의 가치’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우선하고, 소중하고, 본능적인 정서로 ‘가장 높은 가치의 감정’이다.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대상,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이나 일,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이나 일,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나 일,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마음이나 일’을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을 에로스, 아가페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의미를 한두 줄로 구획 또는 정리하는 데에 익숙하다.

 

에로스의 사랑은 고대 그리스의 통상적 사랑으로 육체적인 사랑에서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동경·충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반면에 아가페의 사랑은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종교적 사랑, 신에 대한 사랑, 조건 없는 이웃 사랑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자기희생 등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값진 보석과 같은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기쁘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에로스적 사랑이건 아가페적 가랑이건 사랑은 모두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이해인 시인의 시 한 편의 일부를 소개한다.

 

 

마음에 사랑이 넘치면

 

마음에 사랑이 넘치면

눈이 밝아집니다

부정적인 말로 남을 판단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말로 남을 이해하려 애쓰게 됩니다

 

마음에 사랑이 넘치면

얼굴 표정에도 밝은 웃음이

늘 배경처럼 깔려 있어

만나는 이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매우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를 위해서 열려 있는 사랑의 행동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보석입니다(이하 중략)

 

 

 

 

서재원 이력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포천중.일고등학교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