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미국의 얼굴, 워싱턴DC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건국한 지 300년이 채 안 된 신생국 미국이 현대사의 주인공이 되어 버티고 서있는데, 그 나라 연방정부의 행정수도 외곽에서 35년째 살면서도 서울 사람들이 남산 안 가듯, 위싱턴DC 도심에는 관공서에 볼일이 있거나 외지에서 오는 손님 접대차 원이 아니면 별로 드나들지 않고 살아왔다. 오래된 도시라서 우선 주차가 불편하고 이민자로 살아내느라 급급하여 미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숨 가쁘던 일상이 은퇴로 인해 여유가 생기게 되니 역사와 문화 등 인문학에도 관심을 두게 되고, 바로 옆에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도시가 있다는 것도 요즈음 알게 되었다. 굳이 비행기 타고 시간대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비싼 여행경비 들여가며 구경하러 가는 도시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많은 면에선 오히려 파리, 런던, 뉴욕 등의 도시들보다 훨씬 우월한 관광지임을 절감하며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 이 아름다운 도시를 재발견하는 중이었다.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일정 지역에 영웅이나 천재들이 모여 있으면, 역사는 커다란 전환점을 돌게 되는 것 같다. 삼국지는 고대의 이야기지만 군웅이 활거하며 중원의 역사를 주무른 이야기로 수천 년 지난 요즘도 필독서로 자리하고 있고, 로마 시대에 팔레스타인 땅에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를 불사하며 전한 복음으로 세상은 기원전과 후로 나누어졌으며, 중세의 암흑기가 끝나면서 피렌체에 모여든 천재들로 인해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 것처럼 말이다.


서방세계의 굵직한 획을 그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등을 지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 프랑스 혁명과 비슷한 시기, 이 신대륙엔 걸출한 천재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리더쉽으로 오늘의 미국이 세워졌는데, 그들이 놓은 기초를 도전하거나 흔들지 않으면서 미국은 244년 계속되어 오고 있다.

 

▲워싱턴DC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국회 도서관 내부. 


이 큰 나라의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것을 사양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을 놓고 서민으로 돌아간 조지 워싱턴, 요즘 공전의 히트로 미국 공연 문화계를 강타한 뮤지컬, '해밀턴'으로 더 유명해진, 미국 재정 구조의 기본을 세워놓은 천재 알렉산더 해밀턴, 아직 200여 년간 개헌한 적 없이 미국을 다스리고 있는 미국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은 물론, 인문학, 식물학, 천문학, 건축학 등 미국판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놀라운 인류, 토머스 제퍼슨 등, 몇 사람만 예로 들어도 넓게 추앙받고 있는 지도자들이 드문 이 시대에 비교하면 영웅과 천재들이 한곳에 한시대에 집결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란 나라가 있기 전에 미대륙엔 먼저 13개의 '국가' 같은 주가 있었고, 연방정부가 세워지자 모든 주들이 자기 영토에 수도를 유치하고 싶어 했다. 그런 각 주의 이해관계를 잘 다독이고 설득하여 어느주의 영향도 받지 않는 땅 워싱턴DC를 1790년에 연방정부의 수도로 정하게 된 일등 공신 중 하나가 토마스 제퍼슨이다. 위치상으로 미 동부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기후로 봐도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어떤 계절도 너무 극심한 날씨는 아니며, 지진, 토네이도, 태풍의 발생 빈도가 매우 낮은 곳이라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독립선언서에 천명하였으나 본인은 600명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부유한 농장주였다는 사실과, 사망한 전처가 친정에서 데리고 시집온 흑백 혼혈의 노예와 자손을 낳고 오랜 관계를 지속해온 사생활로 인하여 논란의 대상에도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민주국가로 세워진 미국의 건국 정신과, 그의 비전으로 시작되어 한해에 2천만 명 정도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워싱턴DC는, 그의 업적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들에겐 모두 업적과 함께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논란거리로 인해 업적을 뒤엎어 버리는 역사관은, 내겐 불편하다.

 

▲제퍼슨 기념관.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에서 프랑스대사로 근무한 제퍼슨은 파리를 모델로 하여, 랑팡이라는 프랑스 건축기사에게  설계를 맡겨, 워싱턴DC는 바둑판 모양이 아니고 파리처럼 방사형 도로로 디자인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도로의 디자인도, 오랫동안 이 도시를 친밀하게 여길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유를 갖고 걸어보니 국회의사당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고도제한 법령으로, 흰색을 주조로 네오 클래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거리는, 현대식 고층 건물의 바둑판 도로와는 비교 할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차를 염려하지 않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여유롭게 걸으며 거의 모든 볼거리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도시이다. 역사와 과학과 예술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볼거리 중에 미술 분야로 예를 들자면, 유럽에 가면 길게 줄서서 비싼 입장료를 내고 빼곡한 관중들에 밀려 다니면서 겨우 볼 수 있을지 말지 하는 수준의 작품들이 항상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나를 포함 많은 사람들이 '공짜로 보여주는 것들이 뭐 그리 귀한 것들일까'라는 생각해서일까,  유럽의 유명박물관들처럼 인파가 밀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세잔의 아틀리에가 보존된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을 관광상품으로 심하게 밀고 있었으나 그의 그림은 한 점도 없고,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티스트 고흐가 그의 작품 대부분을 그린 곳, 남프랑스의 작은마을 아를도, 관광상품으로 고흐를 도배해 놓았으나 그의 작품은 한 점도 없다고 하던데, 워싱턴DC에서는 한적하게 무료로 아주 많은 세잔과 고흐의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완벽주의자였으며, 너무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던 다빈치가 완성한 유화로 남아있는것은 전세계에 겨우 10점 미만인데 그중에 한 점이 이 도시에서 무료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마어마한 수준의 작품들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워싱턴DC는 미국이란 나라의 성격과 현주소를 상징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호구처럼 퍼주는 듯 보이기도 하는 젊고 강대한 나라 미국의 얼굴이다. 유럽의 후예임을 말해주듯 파리를 카피하여 디자인하고,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하는 국회 도서관은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미국인'들의 작품이라고 자랑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의 많은 볼거리의 무료관람을 가능하게 한 선발주자인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설립기금이 제임스 스미슨이라는 영국 부자의 기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거다. 그는 독신으로 사망하며, 새로운 지식의 발전과 확산을 위하여 신생국인 미국에 그의 전재산을 남기고 싶다고 유언했고, 우여곡절을 거친 후 미국 정부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그 돈을 금으로 바꿔 배에 싣고 와서 1846년에 세계 최대의 교육, 연구, 전시기관인 스미소니언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워싱턴DC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다빈치의 그림, Ginevra de Benci. Ginevra는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영국정부에서 그 돈을 안준다고 끝까지 버텼을 수도 있었고, 금을 실은 배가 해적들에게 털리던가 침몰해 버렸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 뱅킹으로 손쉽게 송금이 되는데 말이다. 1829년 사망하기까지 생전에 한 번도 미대륙에 와보지 못한 스미슨의 유해는 전화기 발명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그래함 벨이 앞장서 1904년에야 미국으로 와서 스미스소니언에 안치되었다.


워싱턴DC와 수도권에 속하는 지역에 사는 한국 교민들은 15만 명 정도라고 한다. 미국 시민권자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아니까, 나도 그중에 한명으로 집 계되었으리라. 대한민국 수도에서 낳고 자라 미국의 수도에서 성년의 가장 바쁜 세월을 살아내고, 우물쭈물하다 보니 은퇴 시절에 와있다.  어른의 눈으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고향 서울은, 대한민국의 눈부신 번영으로 인하여 너무나 화려해 졌고, 내가 그리워하는 모습은 더는 그곳에 남아있지 않은, 사뭇 낯선 도시가 되었다.

 

이제는 옆에 있어도 낯설었으나,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 도시에서,  인류에게 퍼주지 못해 안달하는 듯 인심좋게 펼쳐놓은, 문화와 역사와 과학의 지식의 확산을 추구하는 귀한 자료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접하며, 내 삶이  풍성해지는 날들이 허락되길 소망한다.  팬데믹이 지나고 집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그날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