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소화해 낸 영국배우 숀 코너리가 10월 31일 별세했다. ▲ 숀 코너리는 2000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숀 코너리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존스 박사로 출연했다. 영국 여왕이 귀족이 아닌 평민에게 작위(Knight Bachelor 또는 Knighthood)를 수여하는 경우가 있다. 60년대를 풍미한 영국의 4인조 록밴드 <비틀스>의 멤버 링고 스타가 그랬고, 세계적인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기사작위를 받았다. 이른바 ‘대영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현저하게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최하위 서열이기는 하지만 가장 유서 깊은 기사 계급으로, 헨리 8세 때 처음 등장했다. 한때 유럽 다른 나라에도 있었으나 지금은 영국에서만 이 기사작위를 수여한다. 역사적으로 하급 기사는 기사단에 속하지 않아 휘하에 부하를 거느리고 출전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햄릿(Hamlet)>의 명연기로 이름을 떨친 연극배우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Kerr Olivier)도 1907년에 기사작위를 받아 시선을 끌었다. 작위를 받으면 존경의 의미로 ‘써(Sir · 卿)’라는 칭
살다 보면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때부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명쾌하게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는 차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덜 중요한 것을 과감히 버리는 지혜가 중요하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낙관론도 때론 필요하다 “물고기를 내가 갖고 싶다. 곰 발바닥 역시 갖고 싶다. 그러나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리라. 생명도 내가 아끼는 것이요, 의리 역시 내가 아끼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동시에 취할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 ‘웅장여어(熊掌與魚) 즉 '곰 발바닥과 물고기'라는 뜻으로,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는 경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취사선택하기 어려운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맹자(孟子)>에서 유래되었다. 맹자가 말하는 물고기와 곰 발바닥은 요리를 가리킨다. 맹자는 물고기를 생명에, 곰 발바닥을 의리에 비유하면서 의리가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여긴 것이다. 마치 곰 발바닥 요리가 물고기 요리보다 더 귀하듯이 말이다. 요컨대 맹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자기 목숨보다 의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
야생동물들은 낮에는 즐겁게 운동을, 밤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음식물은 조물주가 지정한 것만 먹는다. 그것도 자연식과 소식을 하며 병증이 느껴질 때는 본능적으로 절식을 한다. 그리고 피부호흡을 통해 체내의 독소를 배출하고 충분한 산소를 취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야생동물들은 근심과 걱정이 없으며, 마음이 온전히 쉬고 있다는 것이다. 생태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야생동물에게는 질병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자연계에는 사람과 사람이 기르는 동물에게만 만성질환과 난치성 질환이 많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자연의 질서에서 가장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생태 관리학을 살펴보면 야생동물에게 질환이 생긴다고 해도 사람들이 오염시킨 환경이 원인이 되어 생긴 중금속이나 화학물질의 중독, 기생충 감염, 몇 가지 세균성 질환을 제외하면 만성적 질환은 거의 없다. 사람들에게 흔한 고혈압, 당뇨, 심장병, 암, 비만 같은 병이 없으며, 관절염이나 중풍에 걸려 절룩거리고 다니는 야생동물은 볼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혈압 환자가 약 1000만 명, 고지혈증 환자 700만 명, 당뇨병 환자 500만 명, 수백만 명의 비만 환자가 있고, 성인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고 있
내가 이곳에서 좋다, 좋다 말하면서 사는 이유도 그렇다. 시골을 선택하고, 책을 선택하고, 커피를 선택하고, 음악을 선택하고, 나무를 선택하고 하는 것들. 즉 내가 좋은 것을 선택하니 좋을밖에. 그들이 떠난 후에야 나는 안으로 들어왔다. 비로소 세상이 편안해졌다. 책방에서의 언어, 책방에서의 대화가 나를 행복하게 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손님은 종일 그들이 전부였다. 손님이 왔다. 그들은 커피를 주문하고 책방을 쓱 둘러봤다. 분위기가 책에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에 집중했다. 손님이 오면 나는 내 책상에 앉아 일한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손님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중년의 여성과 남성 4명은 목소리가 컸다. 한 사람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이 커피 한 잔 값으로 주식을 사면 10년 뒤, 20년 뒤 인생이 달라지는 거야.” 순간 그동안 내가 마신 커피값으로 만약 주식을 샀다면, 생각했다. 30년도 더 커피를 마셨으니 커피를 마시지 않고 그 돈으로 주식을 샀다면 나는 얼마나 큰 부자가 되었을까. 큰 부자가 되어 나이 든 내가 이제부터 커피를 마셔야지, 한다면 나는 아마 값비싼 커피를
대한민국에서 나랏돈으로 교육받은 인재(?)가 미국의 성실한 시민으로 이 나라의 한 구석에서 열심히 공헌했다는 자부심으로 퉁칠 수도 있겠으나, 굴러온 돌에게 박힐 곳을 내어준 이 나라가 고마운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구호물자를 받던 나라였으나 이제는 세계 무대에 입지를 세운 대한민국 자손의 자긍심은, 세계인들이 모여 사는 이 나라의 중앙무대에서도 돌려주고 나눌 때 완성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미국 주류 사회에서 평생 일했어도 나도 직장에서 퇴근하면 항상 한국으로 돌아와 살아온 듯하다.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삶을 나누고 친분을 쌓으며 살지 못한 것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이 비교적 많은 지역에 정착한 덕분에, 나에게 편안한 문화 가운데에서만 살아올 수 있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퇴직을 결심한 후, 미국 사회에 뭔가를 돌려줄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램을 갖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왔으나, 유리 지갑이라서 꼼짝없이 세금 열심히 낸 거 말고는, 한인사회에서만 나누고 주류사회에 돌려준 것이 별로 없다는 나의 결산 장부 때문이
공주–논산-전주-완주 여행기 ▲전통 기와집의 멋과 풍취를 그대로 간직한 전주 한옥마을. 전주의 맛과 멋, 한옥마을 논산의 명재고택을 뒤로하고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려 호남의 고도 전주로 갔다. 남도의 풍류와 한옥의 아름다움, 맛있는 음식이 손짓하는 유서 깊은 도시다. 시간은 벌써 오후 1시가 지났다. 맛의 본고장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재미를 놓칠 수야 없다. 전주의 명소 한옥마을엔 수많은 맛집이 있지만 우리는 비빔밥의 명소로 알려진 집을 찾았다. 빈 좌석을 찾아 앉았지만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린 보람은 컸다. 전주비빔밥의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임을 실감했다. ▲전주시 한옥마을의 경기전 담장위에 곱게 핀 배롱나무꽃. 식사 후 비빔밥 맛의 여운을 안고 근처의 경기전 담장을 따라 걷고 건축된 지 100년이 넘었다는 전동성당도 구경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진본 어진이 보관돼 있었던 경기전은 조선왕실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진본 어진은 서울로 옮겨가고 지금은 사본이 모셔져 있단다. 전동성당은 외관의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지금은 수리 중이어서 전부 가림막에 가려
지구를 덮친 팬데믹으로 지난봄에 시작된 집콕이 계속되는 가운데 2020년을 마감해 가고 있다. 하늘도 맑고 공기는 청명한데, 2021년에도 예전의 일상은 쉽게 돌아올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시작된 사스나 메르스가 태평양을 건너오지 않았던 전례로, 코비드 사태에 방심했던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는 바다 건너 불구경하다가 무차별 융탄폭격을 받았다. 지난 2월 말, 엎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행한 그리스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그리스나 미국은 조용했다. 3월 초에 집에 돌아와서, 여행 중 환승으로 들린 파리나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혹시라도 바이러스를 묻혀왔을까 봐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2주가 끝나갈 무렵, 미국이 문을 닫기 시작하며 나의 집콕은 남들보다 2주 먼저 시작되었다. 처음엔 한 달 정도면 팬데믹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여, 집에 있는 양식으로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냉장고 파먹기 신공이 뭔지 보여주며, 아예 시장도 안 가고 철저한 집콕으로 바이러스 퇴치에 동참해야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다. 뉴욕 맨해튼 응급실에 근무하는 친구 딸은, 자신은 코비드를 앓고 지나가게 될 테니 각오하라는 연락을 부모에게 해왔고, 다른 수많은 의료진처럼
공주–논산-전주-완주 여행기 ▲공주 영평사 대웅전. 추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코로나에 앗긴 한가위의 즐거움을 찾으러 떠난 여행이었다. 올해 추석엔 코로나19 확산으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명절의 즐거움을 누리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년 명절마다 누려왔던 큰 즐거움을 놓칠 순 없는 법. 그래서 그 어딘 가엔 숨어있을 즐거움을 찾고 싶어 길을 떠났다. 비록 코로나의 횡포가 겁났고 정부의 엄포가 지엄했지만 즐거움을 향한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 한가위의 즐거움은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가족 모임도 자제하라, 고향 방문도 삼가 달라’는 정부의 엄포성 당부가 방방곡곡을 파고 들였다. 심지어 조상의 음덕을 기리려는 후손들의 정성마저 정부가 ‘공동묘원 성묘나 분향 금지’조치로 막아버린 명절이었다. ‘못난 국민들’ 탓인지, ‘잘하는 정부조치’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즐거움 찾아 떠나는 길은 즐거웠다. 나와 집사람, 그리고 집에서 추석 연휴를 즐기려던 딸은 추석날 정오 무렵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가을 색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찾아보려 했다. 그 방법으로 우리는 아늑한 산사(山寺),
나의 행복론은 바로 내가 ‘나’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내가 ‘나'로 살지 못했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지. 나는 ‘나’로 살지 못했지. 왜일까. 나는 누구누구의 딸이며, 누구누구의 아내이며, 누구누구의 며느리이며, 누구누구의 엄마인 까닭에. 그것이 필요로하는 엄격한 책임과 의무에 매어 나는 언제나 그 뜻에 따라야 하지 않았던가. 행복하냐고요? 글쎄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혹은 하는 말 중의 하나가 ‘행복’이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행복하세요’, ‘행복을 빕니다’, ‘~에게 행복을…’ 등 그 ‘행복’에는 언제나 주술적 의미가 뒤 따른다. 좋은 것이기에 나에게도 남에게도 언제나 베풀고 싶은 것-. 수없이 듣고 수없이 했던 말—. 그것이 바로 아주 보편적 일상어인 행복이란 어휘가 아닌가. 대체 그 행복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흔히, 그리고 많이 쓰이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언제나 ‘글쎄요…’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을 가리켜 ‘행복’이라고 하는지, 좀 더 부연하면 이처럼 나이를 먹고 긴긴날을 살아오는 동안도 행복에 대해 올바른 답을 갖지 못하고
암 환자가 지금 어떤 치료를 받고 있든지 다음과 같은 생활요법이 꼭 필요하다. 절식과 생채식을 통한 해독, 그 후 곡식과 채식 위주의 소식, 낮에는 햇볕을 쪼이면서 걷기, 밤에 일찍 자고 충분히 휴식하기, 더운물 목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온열요법, 심호흡이나 나체요법과 같은 산소요법, 그리고 병을 보지 말고 이미 다 나았다고 믿고 상상하기, 나아가서 삶의 더 높은 목표를 향하여 도전하기 등이다. 이와 같은 생활요법들은 우리 피를 맑게 해 주고, 그 맑은 피를 전신에 잘 돌게 하여 결과적으로 전신의 세포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하게 해 준다 오래전 내가 외과 전문의 시험을 보았을 때 “암에 대한 3대 치료법을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된 일이 있었다. 그 정답은 수술, 항암 요법, 방사선치료였다. 나는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에 만난 암 환자들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3대 요법만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3대 요법이란 암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암의 결과, 곧 눈에 보이는 암의 증세만을 제거할 뿐 암의 근본 치료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6년 어느 날 중증 간암 환자가 우리 클리닉에 찾아왔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
이 글귀를 반지에 넣으시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도 이 글을 보게 되면 전하께서는 자만심을 가라앉히실 수 있을 것이요, 또한 절망 중에도 이 글을 본다면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사울(Saul)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그때가 대략 BC 11세기 초.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막강한 힘을 과시한 사울 왕은 후계자로 다윗(David)을 지목한다.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 이새(Jesse)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새는 교회나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이새의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뭇가지에 여호와가 강림한 것이 ‘예수(Jesus)’라고 믿는다. 이새가 아들 덕분에 더 유명해진 일화가 있다. 어린 양치기 다윗이 앙숙인 이웃 나라 필리스티아(Philistia,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다. 대충 불곰 크기의 거인 골리앗의 이마에 돌멩이를 던져 쓰러뜨린 뒤 칼로 목을 베었다고 전한다. 아들 다윗은 이스라엘을 재통일하여 왕이 되고, 다윗의 골리앗 제압은 그리스도의 이스라엘 입성을 예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 그러나 가을은 무엇보다 고독해지는 계절이다. 고독이 병처럼 깊어가는 계절이다. 그리해서 다만 혼자이며 자아를 만나는 계절, 신을 생각하며 하나의 생명에 대해 진실로 겸허하고, 하나의 섭리에 대해 숙연하며, 하나의 죽음에 대해 무상(無常)을 깨닫는 계절이다. 문득 열어젖힌 창밖에 가을이 내린다. 하늘이 투명하다. 우수스이 낙엽이 진다. 한 줄기 바람, 바람이 불어온다. 언뜻 불어오는 바람결에 묻어 있는 가을 냄새. 가을은 이제 우리의 창밖에 와 있다. 햇빛은 깊고 푸르며 한 점 티도 없이 맑다. 한여름 계곡물이 맑다 한들 이만이야 하랴. 차라리 가을 햇빛은 이리 맑아 못내 슬프다. 나는 이런 가을 햇빛 속에서 현기증이 난다. 내 초라한 육신을 가릴 옷 한 자락 남김없이 속속들이 비춰내는 저 깊고 투명한 햇빛-. 가을은 이제 깊을 대로 깊고 익을 대로 익어 있다. 가을은 우리 일상의 번요한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하는 계절이다. 아침, 복잡한 소음으로 빠듯이 짜인 하루가 시작되고 은행으로, 백화점으로, 어두운 사무실 구석으로, 크레졸 냄새가 풍기는 병원으로,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 속으로 부산히 찾아가는 우리들 머리 위로, 눈앞으로 편편이 병든 나뭇잎이 흩날
낱개로 갈라진 마른 마늘쪽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생명체들이다. 여름부터 잠을 잔 마늘은 가을이 지나가도 깨지 않는다. 겨울이 시작되는 늦가을에 농부들은 마늘을 땅속에 심는다. 마늘은 추운 겨울에 땅속에서 얼어 죽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껍질로 단단히 몸을 싸고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때쯤이면 이번에는 속히 마른 껍질을 벗고 물을 빨아올려 싹틔울 채비를 시작한다. “마늘을 까보셨습니까?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한쪽의 마늘에서 나는 자연의 순리를 깨우친다. 삶의 지혜도 함께 배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에 이르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말 못 하는 마늘이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건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마늘을 통해 자연의 순리를 깨달으며 ‘삼라만상이 모두 스승’이라던 선현들의 가르침을 새삼 되새기곤 한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런저런 집안일로 바쁜 집사람이 바싹 마른 마늘 30여 통을 까달라고 갖다 놓았다. 아주 심하게 말라 마늘통들이 부딪히며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내가 집사람을 위해 마늘을 한꺼번에 많이 까거나 빻아 주는 일은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이다. 그것도 마늘이 많
▲존 덴버의 컨츄리 음악 'Take me home country road' 가사 첫 부분에 나오는 가사 '...블루리즈 마운틴 셰난도아 리버..."에도 셰난도아 국립공원의 이름이 등장한다. 미국엔 수백 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사진 한 장만으로도 동공이 확 열릴만한 진기한 풍광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들이 많지만, 장거리를 불사하고 가볼 만하다기보다는, 자연환경 보존의 목적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는 곳들도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자동차로 두세 시간 떨어진 버지니아주, 애팔래치아 산맥 가운데 블루리지 마운트에 위치한 셰난도아는, 사진 한 장으로 먼곳의 방문객을 불러들일 풍광은 없는 국립공원이다. 미국의 자연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엄한 대자연의 그랜드캐니언, 옐로스토운, 브라이스캐니언 등을, 예전에 서부에서부터 동부로 자동차 타고 이사 오면서 이미 섭렵한 우리에게도, 셰난도아는 경관이 대단할 것은 없는 수준이다. 가볼 만한 곳이 너무 많던, 신묘막측한 풍광이 펼쳐진 칼리포니아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후엔, 타지에서 손님이 오셔도 마땅히 구경시켜 드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10여 년 전 쯤, 한국에서 오신 손님
▲코로나 덕분에 가장 좋았던 것은 야외 콘서트를 진행한 것이다. 야외 콘서트를 몇 번 진행하려다 형편상 진행하지 못했는데, 코로나는 덕분에 실행하기로 했다. 실내보다 실외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해주세요.” 미장원에 갈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오래도록 짧은 커트 머리였다. 그 이전에는 단발머리였다. 파마를 한 것은 20대 초반에 한 번, 30대 후반에 한 번뿐이었다. 30대 후반에 파마를 하고 그대로 머리를 길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긴 머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때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생소하다. 지금 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미장원에 간 것이 꽤 오래됐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미장원을 딱 한 번 갔다. 커트 머리가 길어져 더 견딜 수 없을 때 달려갔다. 이렇게 질끈 묶고 얼마를 지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태로 잠시 더 있어 볼 예정이다. 옷도 한 번 사러 가지 않았다. 있는 옷도 많다. 시골에 살면서 옷 욕심은 더욱 없어졌다. 차리고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두 벌로 한 계절을 난다. 생필품은 대형마트에 가서 남편이 사 온다. 책방을 하고 있다는 핑계로 나는 통 나가지 않는다. 봄여름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