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뉴저지, 버겐카운티로의 짧은 여정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뉴저지, 버겐카운티

Bergen county, NJ

 

2023년 3월말, 워싱턴 디시에 벗꽃이 눈부시던 날,  뉴욕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웃에 살다가 뉴욕 근교로  5년전 이사 갔으나 팬데믹으로 오가지도 못하고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결행한 여정이다.

 

뉴욕은 세계인들이 와서 살고 싶어하는 압도적으로 멋있는 도시이다. 문화와 예술이 넘쳐나는 곳, 미국의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미국의 수도이지만 뉴욕에 비하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워싱턴 DC 주민에게도, 뉴욕은 엄청나고 매력적인 곳이나, 관광의 목적으로 쉽게 드나들기엔 부담스러운 도시이다. 자유롭게 자동차로 이동하고 주차할 수 없으니 뉴욕을 즐기려면 체력적으로 우선 부담되고, 물가가 상대적으로 비싸니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운 곳이다.

 

 

친구는 한인들이 뉴욕에 정착하여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하면 거주하고 싶어하는 지역인 버겐카운티(카운티는 주를 나눈 행정 구역으로, 한국의 도를 나눈 군과 비슷하다)에서 살고 있다. 맨해튼에서 허드슨강을 건너면 바로 만나는 곳으로, 뉴저지주에 속하는 동네이다. 문화와 예술과 경제의 중심지인 맨해튼과의 근접성뿐 아니라 허드슨 강변의 바위 절벽과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강 건너로 보이는 멋진 자연경관이, 왜 이곳이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동네인지 그대로 설명해준다.  

 

 

쉽지 않은 여정을 결행할수 있었던 것은, 버겐카운티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소설 “파친코” 작가 이민진을 초청한 행사에 친구가 초대해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커뮤니티 컬리지는,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누구든지 입학할 수 있는 2년제 공립대학이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4년제 대학에 진학하지 못 했다 해도, 패자부활전처럼, 커뮤니티 컬리지에 가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아이비리그 대학으로도 편입할 수 있다.  대학등록금이 부담되는 사람들에게도 저렴하게 대학교육을 받을수 있게 해주고, 장학금을 얻어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할 수도 있으니 스스로 하고자 하면 교육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제공된다는 미국 교육정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버겐카운티에는 활발하고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 센터가 있고, 커뮤니티 컬리지에는 한인 재학생들이 상당히 많다. 두 기관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인 리더들의 노력으로, 버겐 커뮤니티 컬리지에는 한국어로 강의 하는 수업도 있다.

 

그곳의 학생인 친구 덕분에 나도 수업시간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미국사 강의를 한국어로 강의 하는데 정식으로 학점을 이수할 수도 있고 평생 교육의 차원에서 듣는 과목으로, 대부분 은퇴한 교민들이 학생이지만 한국에서 유학온 젊은 학생들도 있다.

 

요즘 고국의 위상이 경제와 문화에서 인지도와 위상이 높아지고는 있으나, 다른 소수 민족들의 언어로 강의하는 수업은 없는데 한국어 수업이 있다는 엄청난 특혜는 놀라웠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일해 온 한인 사회의 리더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업 시간에는 이민진 작가 초청 간담회에 패널 중 한 사람인 전후석 감독이 왔다. 그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휴가차 방문한 쿠바에서 우연히 한국인으로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삶이 바뀌게 되었다. 세계 곳곳에 퍼져서 살고 있는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알리는 감독이다.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건에서 유래된 단어, 디아스포라가 그의 화두이다. 디아스포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먼 곳에 파종한다는 의미이다. 전후석 감독은 우리 민족이 타문화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번성해 온 역사와 현재가 한민족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비전 제시를 사명으로 품고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걷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이다. 

 

버겐카운티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그의 비전과 예술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며 '대학 상주 예술가'로 학교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해주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미국의 세금으로 한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예술가를 전폭 지원하고 있다니…. 이곳에서도 한인들의 존재감과 위상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음을 본다.

 

전후석 감독이 만든 영화, '헤로니모'(2019)는 한국에서도 상영되어 알려진 다큐멘터리이다. 주인공 헤로니모(임은조)는 쿠바에서 태어나 젊은시절 쿠바 혁명가로, 그리고 인생의 말미에는 쿠바 한인 공동체를 부활시키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다. 그가 공산주의 혁명가였다는 점에만 초점을 두어 좌편향 영화라서 불편하다는 반응은, 큰 그림을 볼 수 없는 편협한 시선이라고 생각된다.

 

 

전 감독의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적인 배경과 현황에 관한 특강 이후, 이민진 작가와 전후석 감독을 비롯하여 학교 교수들이 패널인 간담회 장소로 이동해 갔다.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는 젊은 학생들을 포함하여 많은 지역 한인들도 참석한 간담회의 주제는 '아시안 혐오 범죄들과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간담회는 좀 산만하게 진행되어 주제를 잘 정리하지 못했으나,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인 만큼 화두가 던져진다는 것이 시작이므로 대학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사를 주관해준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간담회를 마친 후에는 이민진 작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미리 신청한 참석자 모두에게 학교에서 식사를 제공하였고, 메뉴도 한국음식이어서, 이 학교에서 한인 커뮤니티에 아낌없이 부어주는 지원에 다시 놀랐다.

 

 

재일 한인들의 삶을 조명한 영어 소설을 써서 미국 사회를 감동시키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계인들에게 알려준 이민진 작가와 개인적으로 기념사진도 찍고 책을 읽고 묻고 싶었던 질문도 답을 받을 기회를 갖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한인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나에겐 거의 판타지같이 느껴질 정도의 선한 사람들을 많이 그려낸 이민진 작가에게 물었다. 그렇게 선하고 편견없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보았는가……

 

이민진 작가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아주 많이 만났다고! 순수하고 희생적인 한인들은 어디에나 많다고.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꿈꾸며 그들을 작품 속에 그려 나간다고 말한다.

 

오후에 있었던 작가의 강연을 들은 후 이민진은 그녀의 책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민진 작가는 전후석 감독과 같은 맥락에서, 세계 속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그들의 역할에 대하여 강연했다. 강연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디아스포라.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타향에서 살아가는 삶은 구약에서는 형벌의 의미였다. 지금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 수 있는 것일까. 그 '영향력'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가추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민진 작가는 세상을 향하여 내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 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게 된 책을 쓴 작가가 된 지금,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라고 믿는다.

 

그런 기회가 허락되었을 때 잘 하지 않으면 다른 아시안 여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책임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잘 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세상을 향하여 꼭 전달해야 하는 화두인지 늘 생각하고 준비한다.

 

 

강연을 마치고 청중들에게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질문자들 모두의 이름을 물어 보고 경청한 후 친절하고 따스하고 성의있게 대답해 주는 이민진 작가의 태도는 그녀가 강연한 내용 그대로 이 기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보여주었다.

 

점심시간에 잠시 대화를 나눈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우리가 나눈 대화를 강연에서 다시 언급하기도 하는 것을 보며, 작가가 매 순간을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임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어린 날부터 교육받고 언어의 장벽이 없어진 전후석과 이민진, 그리고 여기서 태어난 후세대들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이민 1세대들보다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더 많이 고민한다.

 

미국에서 문화와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소수 민족 유대인의 인구는 760만 명 정도(전체 인구의 1.8%)이고, 한인들은 2백만 명 정도이다. 미국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한인들이지만 버겐카운티에서는 6% 정도를 차지하고, 이민진 작가도 버겐카운티에서 자랐다고 한다.

 

버겐카운티 커뮤니티 칼리지의 한인 학생들도 인구비례에 맞게 6%정도라고 한다. 다른 지역보다는 한인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10%도 안되는 소수민족 집단에게 버겐카운티에서 보내주는 막강한 지지는, 한인 사회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지표라고 생각된다.

 

전후석 감독이 제시한 화두처럼, 디아스포라로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은, 대한민국의 세계를 향한 영향력과 맞닿아 있다. 이민진 작가가 영어로 써서 출판하여 세계인들에게 전해준 재일 한인들의 이야기는, 디아스포라 한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오랜만에 그리운 친구와 보낸 시간들도 소중했으나, 이 시대의 자랑스러운 미국 속의 한인들을 만나고 세계의 중심 뉴욕 근교 버겐카운티에서 자라나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을 확인하는 보람있고 감동적인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