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5천 년을 열흘에 본 이집트 여행 7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12월 23일

 

오늘은 청명한 날씨 가운데 아스완 근처 나일강의 한 섬에 지어진 필레(Philae) 신전으로 향한다. 기원전 6~7세기에 지어져 기원후 6세기에 이르도록 신전의 역할을 담당하던 아름다운 유적이다. 원래 필레 섬에 있어 나일강이 범람할 때면 반쯤 침수되어 훼손되던 신전은 아스완 댐이 지어지면서 유네스코 주관으로 다른 섬으로 이동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관광객들을 맞는다.

 

 

이곳은 배를 타야 갈 수 있다. 눈부신 12월의 햇살 가운데 모터보트로 잠시 이동하면 물 가운데 떠 있는 듯한 아름다운 고대 건축물을 만난다. 고대 이집트 말기 왕조가 짓기 시작하였으나 지금 남아 있는 건축물들은 그레코로만 스타일로, 대부분 그리스 사람인 프톨레미 왕조가 신축한 대로이다. 지금은 없어진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가 벽면에 남겨진 최후의 신전이기도 하다.

 

건축물이 물가에 있으면 자동으로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는데 이 신전도 나일강과 파란 하늘과 쾌적한 바람 가운데 아득한 옛날 엄청난 정성으로 아름답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 신께 바치고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마치 현대 미술 작품처럼 보이는 상형 문자로 벽에 남겨진 고대 이집트인들의 이야기는 1822년에 그 문자를 해독한 프랑스 사람,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덕분에 다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던 고대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 되면서 고대 이집트의 문화, 종교, 언어, 문자 등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동안 해독 불가였던 고대 이집트의 많은 기록물은 1799년 나폴레옹의 장교 피에르 프랑수아 부샤르가 발견한 화강암 석판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부샤르는 알렉산드리아 근처 항구 도시 로제타에 있는 오스만 제국 요새의 건축 자재로 쓰였던 돌조각에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와 고대 이집트의 서민들이 쓰던 문자 그리고 그리스 문자로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동네에서 영국과 치고받고 싸우던 프랑스가 패배하자 로제타석은 영국의 차지가 되었다. 오늘날 대영 박물관의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로 자리 잡았으나, 로제타석의 고대 이집트 문자를 해독해 낸 사람은 프랑스 사람, 샹폴리옹이다. 이집트 고대 문명의 경이로움만큼이나 인간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능력도 탄복하게 만든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업적이 달리 없는 엔지니어 출신 프랑스 장교 부샤르는 건축 자재로 굴러다니던 오래된 석판 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임을 알아본 것으로 인하여 대영 박물관과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 당시 이집트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관심 없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 프랑스 장교를 포함한 유럽인들이 무한한 관심과 호기심을 보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의 문명의 뿌리에 고대 이집트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신전을 방문한 후, 5㎞ 정도 떨어진 아스완 댐으로 간다. 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아스완 댐은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지만 입구의 경비가 삼엄하다. 가이드 말로는 아스완 댐이 무너지면 이집트가 물에 잠겨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에 대만과 중국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대만이 중국의 양쯔강 댐 하나만 폭파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으니 겁 안 난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하며 퇴적물을 강가로 밀어 비옥한 옥토를 펼쳐주기도 하였으나 홍수로 인한 피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세운 아스완 댐. 이집트에 막대한 전기와 일자리와 안정된 관개 시설 등을 보장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한다. 나일강이 밀고 내려오던 침전물이 댐에 막혀 갇히게 되자 자연 생태계가 교란되고, 침전물이 쌓이지 않는 이집트 땅도 더는 옥토가 아니게 되는 등 인류가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연을 만지작거려 야기되는 현상이 여기에도 산재해 있다. 이집트의 두 번째 대통령의 이름인 나세르로 불리는 광활한 아스완 댐의 호수, 나세르호를 바라보며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인구를 관리해 오다가 노령화와 인구 절벽을 맞이하고 있는 요즘 대한민국도 같은 맥락인 듯한 사념에 잠긴다. 인류가 쌓아온 과학과 기술로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으나 환경 파괴, 정신적 피폐, 인구의 노령화, 부의 불공평한 분배 등 같은 또 다른 문제들이 그 뒤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딜레마에 대하여…….

 

댐을 둘러본 후, 아스완에서 작은 트럭만 한 크기의 배를 타고 나일강 폭이 비교적 좁은 곳을 지난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생태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누비아인의 마을로 간다. 누비아인은 수단 북부와 이집트 남부에 걸쳐서 살아온 민족인데 찬란한 문명과 풍요를 누리며 북쪽의 이집트를 위협하던 고대 왕국 쿠시(Kush)의 후손들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이 이룬 이 찬란한 고대 문명은 근래에 와서 발굴되고 조명이 되기 시작하여 연구가 활발하지만 세계사 시간에 들어본 적이 없어 이름이 생소하다. 누비안(Nubian)이 검다는 의미라고 하니, 그들을 검다고 부른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래전부터 국가 없이 이집트와 수단의 소수 민족으로 존재감 없이 살아왔으나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조상들이 살아온 지역에서 고유의 문화와 언어로 살아온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아스완 댐 건설로 그들이 살던 마을이 수몰되어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근처 나일강 강가에 현재의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작은 바위섬들과 군데군데 솟아 있는 바위에 강물이 부딪혀 만들어지는 하얀 물줄기를 따라가면 이집트에 와서 본 적이 없는 밝고 경쾌한 색으로 채색된 집들, 강가 언덕에 서 있는 누비안 빌리지를 만난다. 배에서 내려 마을로 올라가 관광객들에게 공개하는 주택에 들어가 본다. 여러 세대가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벽마다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어 있고 애완동물로 악어를 키우며 산다. 목축이나 농경 등 1차 산업에 종사하고 대부분의 주민은 이슬람교를 믿으며 비교적 심플 라이프를 살아간다고 한다. 관광객을 위한 숙박 시설도 눈에 띄는데 현지 가이드는 교육에도 관심 없고 미래에도 관심 없이 아무런 희망이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평한다.

 

 

오후에 유람선으로 돌아와 휴식한 후, 나일강의 상징 같은 돛단배, 펠루카(Felucca)를 타본다.

 

모터로 배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요즘에도 온전히 바람의 힘으로만 가는 펠루카는 조용한 승선감과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으며 나일강을 떠다닌다. 펠루카의 선원들은 누비안인으로 그들의 전통 음악을 연주해주기도 한다.

 

 

12월 24일

 

어제 펠루카를 타며 맞은 늦은 오후의 강바람이 쌀쌀해서인지 목이 좀 아프다고 느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감기 증상이 확실하다. 팬데믹 중에는 감기 증상이 있을 때마다 자가 진단 키트로 항상 코비드가 아닌지 확인해왔다. 확인해 보니 양성 반응이 나온다. 남편은 다행히 증상도 없고 음성 반응이다.

 

지난 3년간 집에서 숨어서(?) 지내며 팬데믹을 잘 피해 오다가 처음 여행을 나오자마자 코비드에 걸렸다는 낭패감보다 단체 여행이니 지금부터 3일은 어떻게 격리하다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가이드에게 보고하니 남편과 계속 같이 있으면 남편도 더는 여행 일정에 참여하지 못하니 방을 옮기라고 한다. 한 사람이라도 나머지 일정을 마치는 것이 낫고 그것이 함께 있다가 남편도 양성이 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결론 내고 남편은 다른 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 이후로는 유람선 직원들이 내 방으로 식사를 배달해 주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는 TV에서 방송해주는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며 나 홀로 유람선 객실에서 보냈다. 다행히 감기 정도의 증상으로 타이레놀을 시간 맞춰서 먹으니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일행 모두가 관광 나가서 배가 비었을 때는 햇살이 쏟아지는 유람선 옥상 데크에서 나 혼자 유람선을 전세 낸 듯 즐길 수도 있었다.

 

코비드에 감염되어서 이틀간 관광 일정을 놓쳤으나 중요한 유적들은 이미 다 본지라 별로 억울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아주 조금 보는 손해로 지난 3년간 지구촌이 겪어낸 고난에 살짝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12월 26일

 

오늘은 다시 룩소르 공항에서 비행기로 카이로를 향해 날아가는 일정이다. 일행들이 타는 버스에 태우지 않고 따로 차편을 마련하여 나를 공항으로 실어 나른다. 비행기는 따로 태울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마스크를 두 개 쓰게 하고, 한 시간여를 날아 카이로에 도착한 후 다시 다른 차편으로 호텔로 데려다준다.

 

이집트의 전통 기독교인 콥트교가 7세기에 지은 카이로의 성전이 여행 일정에 있었으나 격리하느라 호텔에 갇혀서 가 보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가 이집트에 와서 포교하고 순교하며 세운,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한 줄기가 콥트교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예언이 두려워 영아들을 학살한 헤롯 왕을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살다가 간 곳이기도 한 카이로 근처는 모세와 출애굽기의 서사와 함께 신약의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남편은 콥트 교회를 방문한 후에는 모든 일정이 끝나 나와 같은 객실로 보내졌다. 격리된 우리에게 호사스러운 저녁 식사를 배달해준다.

 

다행히 침대가 둘이라서 창문을 열어놓고 멀리 떨어져서 이집트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12월 27일

 

오늘도 다른 차편으로 남편과 나를 공항으로 데려다준다. 매우 어수선하고 복잡한 출국 수속 후 이집트 국적기로 뉴욕으로 향한다. 마스크를 두 개 쓴 나는 조용히 오는데 바로 뒷자석에 앉은 우리 일행 중 한 여자 승객이 10시간 비행 내내 심하게 기침을 한다. 여행사 버스로 함께 다닌 사람 중 나 혼자만 검사해보고 양성인 것을 보고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 지루한 비행 후 뉴욕에 무사히 도착했다. 갈 때는 아침에 집에서 떠나 괜찮았는데 돌아오는 길은 오후 5시에 운전을 해야 하니 곧 어두워진다. 4시간을 운전하여 남편이 굉장히 힘들어한다. 다음부터는 뉴욕에서 떠나게 되면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와야 할 것 같다. 비행기를 오래 탄 후 장거리 운전은 무리라는 것을 이제야 경험으로 터득한다.

 

밤 10시 가까이가 되어 집에 도착했다. 너무 기쁘다. 이런 안락함을 마다하고 먼 곳까지 돈 써가며 나갔다가 그동안 잘 피하며 살아온 코비드에 걸려 고생했으니 힐링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은 고생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정서적인 자산으로 저장될 거다. ( 마지막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