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5천 년을 열흘에 본 이집트 여행 1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카이로 공항은 깔끔한 현대식 건물

1억 인구가 나일강 유역에서 살아가는 이집트
이집트 여인들의 히잡은 스스로의 선택
헬레니즘 느낌의 카이로의 첫인상

 

팬데믹으로 지구촌이 출렁이던, 3년간의 격동의 세월을 지나 2022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백신이 보급되고 사망률이 줄어들자 여행이 재개되었으나 노약자로 분류되는 우리는 여행을 자제하며 지내왔다. 참을 수 없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으나 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집에 있어 주는 것이 팬데믹을 빨리 끝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책임 의식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늙어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아직도 팬데믹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레 여행을 재개해 보기로 했다. 연중행사로 만나본 주치의도 팬데믹이 끝날 때를 기다리다가는 영영 못 갈 수도 있으니 여행을 시작하라고 부추긴다.

 


미국 동부에서 가장 가깝고 익숙한 유럽으로 가는 여행이 우리에게는 제일 편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파동으로 불편을 겪는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시위 중이라는 소식과 난민들로 인하여 뒤숭숭하다는 보도를 접하며 유럽을 비껴 다른 대륙으로 가보기로 했다. 고통받는 사람들 옆에서 유람 다니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다. 


먹어보지 않은 것을 먹고 싶어 할 수 없듯이 가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때는 미디어에서 본 정보로 호기심이 생겨 그곳으로 가보고 싶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수년 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이집트 전시관에서만 하루 종일을 보내고 나서 두뇌 용량 초과로 파김치가 되어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온 일이 있다. 지금 봐도 너무 아름다운 예술품들이 가득한 이집트 고대 문명의 전시물들만으로도 너무나 방대했고, 전력투구로 내세를 준비하며 살아간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이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우리는 언어도 안 통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한 듯한 이집트 여행에 좀처럼 나설 용기가 없다가 이번 기회에 결행하게 되었다. 여행사의 그룹 투어로라도 이집트로 향한 것은 국제 정세에 등 떠밀려 정해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12월 16일


빙점 바로 위를 찍고 있는 12월의 아침, 겨울비가 추적이는 차갑고 어둑한 날씨이다. 아침 일찍(오전 8시) 떠나 4시간 동안 비 오는 길을 달려서 순조롭게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사는 워싱턴 DC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환승할 수도 있으나 겨울에는 자동차로 오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친지의 조언을 따른 선택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넉넉하게 계산하고 온지라, 독일 국적기인 루프트한자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후 5시쯤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집트 국적기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2시간 동안 활주로에서 벌서다가 이륙한다. 비행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혹시 다른 비행기들 다 뜨고 남는 시간에 활주로를 이용하는 약소국의 설움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비행기 뜨기 전부터 2시간 앉아 있다가 오랜만에 장시간 비행하니 힘들다. 젊고 아름다운 승무원들은 대한민국 국적기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눈 호강인 것을 이집트 비행기에서도 확인한다. 


10시간 동안 날아가서 도착한 카이로 공항은 기대한 것보다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다. 무슬림 국가의 공항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좀 어수선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복원되기 전의 청계천 위를 지나던 고가도로 같은 길로 버스를 타고 가는 차창 밖에 예전 청계천 고가 옆에 있던 아파트와 비슷한 모습으로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다.


도착한 호텔은 수에즈 운하를 완공한 기념으로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왕비를 위해 지어진 궁전을 확장해서 설립된 호텔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온 것을 믿을 수 없게 화려하지만 경비가 삼엄하고 출입할 때마다 공항 검색대 같은 입구를 지나게 한다.
 

 

호텔에서 베풀어준 환영 리셉션 만찬에 와인과 맥주가 나와서 놀랐다. 무슬림 국가라서 알코올음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성한 음식들은 터키와 그리스, 이스라엘에서 먹어본 거와 같은 지중해 음식이다.

 

미국 직장에서 접해본 이집트 사람들은 음식을 대접할 때 필요 이상으로 넘치도록 매우 풍성하게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유럽에서는 뷔페식당도 별로 본 적 없고 음식을 차고 넘치도록 주던 기억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아직은 풍요롭지 않은 나라에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음식을 주는 것이 좀 놀라웠다. 배고픈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많을 거 같아서 걱정되었다.


아랍권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손님을 환대하는 친절과 남들에게 부유하게 보이려고 하는 허세와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70년대 초, 허례허식을 근절하자는 강력한 캠페인이 있었던 걸 돌이켜 보니 우리에게도 그런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왔으나 카이로의 첫인상은 모스크의 첨탑이 수없이 눈에 뜨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왕국이라고 생각되는, 헬레니즘의 느낌이다. 

 

 

이집트는 1억의 인구가 국토의 4.5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나일강 유역에 밀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아랍권의 대표적 나라이다. 외국인들은 코리아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이듯이 이집트도 스스로는 미스르(Misr는 국가라는 의미라고 한다)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상징 같은 상형 문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랍어를 사용하고 분명히 존재했던 고유의 언어는 역사 가운데 사라져 버렸다. 


대한민국이 고려 시대에 유럽에 알려져 코리아가 되었듯이 이집트도 초기 기독교 시대에 대부흥으로 인하여 대다수가 콥트 교인이라 불리는 기독교인의 나라로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들을 칭하던 콥트(Copt)가 라틴어로 변형되며 이집트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7세기까지 기독교 국가이던 이집트는 현재 대표적인 무슬림 국가로 존재하며 콥트 교회 기독교인들은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이다.


7천 년의 역사라고 자랑하는 이집트의 찬란한 고대 문명은 수천 년 동안 대부분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었고 거대하고 쓸모없는 돌덩이로 취급되며 버려져 있었다. 현재의 이집트는 1922년에야 영국에서 독립하여 최근의 국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관광이라는 새로운 경제 형태가 된 것은 나폴레옹으로부터 시작되어 유럽인들이 다시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인지라 오늘의 이집트는 빈부의 격차도 크고 정부의 투명성도 열악하여 경제적으로 낙후된 상태이다(1인당 국민소득 14,000불, 세계 100위 정도). 


경제의 가장 큰 부분은 나일강의 비옥한 삼각주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지만 근래에는 관광 수입과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벌어 송금하는 천만 명에 이르는 이집트인들의 기여도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1년에 1,300만 명 이상 들어오던 관광객에 의한 수익에 크게 의존하던 나라가 팬데믹 동안 관광객이 3백만 명으로 줄었으니 역병이 가져다준 사회적인 고통의 여파가 심각했을 거 같다.


가보고 온 사람들이 놀라며 감탄하는 이집트의 고대 문명을 여행사의 빠듯한 일정으로 얼마나 들여다볼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을 하며, 아프리카 대륙으로 날아오며 기대하지 않았던 화려함으로 치장된 호사스러운 호텔에서의 첫 밤을, 그러나 안락하게 보냈다.

 

12월 17일


관광의 첫날은 두꺼운 성곽으로 둘러싸인 카이로 구도시에서 시작되었다. 13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집트를 다스리던 무슬림 왕국의 리더가 쌓은 높고 견고한 성곽 안으로 들어간다. 성곽 안에는 영국의 지배하에 아름답게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이 지금은 낙후되어 매우 남루하게 줄지어 있다. 120여 년 전에 지어진 5층 정도 되는 건물들이 주상 복합이다. 아래층에는 일정한 크기로 상점들이 있고 위층에서는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히잡을 쓴 여학생들이 발랄하게 다가와 사진도 찍고 말도 걸어온다. 이집트에서는 히잡을 쓰는 것이 개인의 자유이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대부분의 여인이 쓴다고 한다. 눈만 보이도록 온통 검은 천으로 가린 복장은, 네모진 눈구멍이 편지 넣는 통처럼 보인다며 "우체통"이라고 냉소적으로 부르며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이지만 개인의 선택으로 그런 복장을 한 여인들도 종종 눈에 띈다.


건물의 아래층에는 일정한 크기의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이 재래시장은 1960년대 남대문시장과 너무나 닮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품이 조악하여 집어 오고 싶은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