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버몬트(Vermont)주의 단풍 3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작가.

 

 

몽펠리에(Montpelier)


버몬트주의 행정수도 몽펠리에는 인구가 8천명에 불과하여 50개 주 중에 가장 인구가 적은 행정수도이며, 행정수도 중 유일하게 맥도날드가 들어와 있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금박으로 칠한 동그란 지붕을 얹은 의사당의 자태와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는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마침 의사당 안 투어도 할 수 있었는데, 버몬트 사람들의 정치 성향과 그들의 자긍심 등을 충분히 느껴볼 수 있었다. 인구 60만명인  작은 주의 의사당이지만,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서 의회 민주주의의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1859년 금박으로 동그란 지붕을 얹어 재건축한 버몬트주 국회의사당.
 

의사당 안의 대리석 장식은 건축 당시 대리석 장사를 하던 정치인이 기부의 형식으로 장식했으나, 누가 봐도 '샘플' 같이 보이는 대리석 조각을 보고 오가는 사람들이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요즘 유행하는 PPL이었던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진정한 섬김으로 골몰하는 정치인은 환상에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사당 안에 장식된 대리석 조각은 기증한 사람이 팔고 있는 대리석의 견본이기도 하여, 의사당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주문하기도 했다니 사심있는 기증이라고 생각된다.

 

웨이츠필드(Waitsfield)


웨이츠필드는 구글 네비게이션도 잘 못 찾아갈 정도로 후미진 마을이다. 인구 1,800명이 사는데, 낮은 곳으로 흐르지 않고 높은 곳을 향해 흐른다는 Mad river 강가에 있다.

 

1,830년에 건설된 후 수많은 홍수를 견뎌낸 지붕 있는 다리(covered bridge)가 아직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는 강가는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수량이 많아지면 주변을 사정없이 덮쳐버려서 미친 강이라는 이름값을 한다고 동네 사람이 설명해준다.

 

우리 자동차의 번호판을 보고 다른 주에서 온 줄 알고는 자진해서 설명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며, 자신도 뉴욕에서 살다가 은퇴해 이곳에 정착해 산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어릴 때 자란 고향이니 은퇴하여 이런 구석진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겠으나, 우리 같은 이민자들은 아무리 평화롭고 생활비가 적게 든다고 해도 한국 야채도 없고, 한국말로 교제할 친구도 없는 이런 동네에서 살 수는 없다. 



▲굳이 강가에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우리를 여기 앉게 한 동네 주민의 작품(?)이 꽤 그럴듯하게 나온 것 같다. 뒤에 보이는 다리가 200년 동안 그 자리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미친 강”의 수많은 홍수를 겪어냈다.

 

작고 구석진 이 마을 근처에도 스키장이 세 개나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하나를 둘러보니 너무나 아름답고, 초보들이 타기에는 서부의 유명한 스키장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Sugarbush ski resort. 버몬트주를 상징하는 목장의 둥근 목초 저장고와 축사의 붉은 색으로 리조트를 디자인했다. 


우드스톡(Woodstock)


버몬트주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세 개를 꼽으라면 맨체스터, 스토우, 그리고 인구 3천명 정도 사는 우드스톡이다. 마을을 둘러싼 수려한 경관의 산이 공급해 준 풍부한 목재, 바로 옆의 강이 주는 수력의 힘으로 나무 제품과 기계를 만들기 좋은 환경으로 일찍부터 부유해진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된 곳이다.


이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부자로는 록펠러 가문의 걸출한 자손, 로렌스 록펠러(Laurance Rockefeller)가 있다. 최초의 환경운동가로 손꼽히는 이 동네 출신인 프레드릭 빌링스(Frederick Billings)의 외손녀와 결혼한 로렌스는 처가의 비전과 뜻을 같이하여 이곳의 환경운동에 크게 기여하고, 처가의 농장 앞에 저택을 지어 살다가 국가에 기부해 그의 저택은 국립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로렌스 록펠러는 와이오밍주의 티탄(Great Teton national park)이 국립공원이 되어 자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빌링스의 농장과 록펠러의 저택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미 1,800년대부터 자연을 보호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경작하고 땅을 개발하며 토양을 보존해 가며 농경과 목축을 해야 한다는 비전을 가졌던 빌링스의 농장은 아직도 친환경적인 낙농법으로 생산되는 유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친환경 낙농을 체험해볼 수 있는 아름다운 농장의 건너편에는 록펠러의 저택이 드넓은 농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록펠러 저택의 정원.

 

버몬트주가 추구하는 친환경, 자연보호의 정신은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준 리더들이 오래전부터 있어서 더욱 깊숙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드스톡 근처에는 버몬트가 자랑하는 협곡, 캐치(Quechee gorge)가 있다.


킬링턴(Killington)


미국의 동부에서 가장 유명한 스키장은 단연코 버몬트의 킬링턴이다. 3,000피트 높이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동부에서 가장 높은 스키 슬로프가 있는 곳이다. 스키장의 규모가 너무나 크고 산도 깊어서, 주변의 깊은 산자락들에 단풍이 가득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곤돌라로 올라가서 본 킬링턴 산 전망. 고도가 높은 곳은 침엽수들뿐이라 위쪽엔 단풍이 없다.


스키 곤돌라타고 올라가서 정상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하며 킬링턴 산을 조망할 수 있었다. 10월 말부터는 인조눈을 뿌려서 스키장을 개장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10월 초인데도 날씨가 많이 차다.

 

▲킬링턴의 스키 슬로프.


이 깊은 산골도 유명한 스키장이라서 빈방은 없고, 킬링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Rutland에서 네 번째 밤을 보냈는데, 그나마 볼 게 없는 그 도시의 호텔도 투숙객들로 바글바글하여 방을 구한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버몬트의 옛 상점(Vermont country store)


다시 버몬트의 남쪽으로 내려오며, Visitor center에서 꼭 들러보라는 상점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비포장도로도 있고 주변에 오래된 건물 몇 개 있는 후미진 길가에 갑자기 나타난 옛 모습의 가게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곳이다.

 

관광버스로 오는 인파는 1,800년대의 동네 만물상을 체험하러 몰려온다. 옛날 모습을 재현한 과자, 사탕, 비누 등 온갖 생필품 등을 파는데 소박한 건물의 외관과 달리 좋은 품질의 물건들을 비싸게 파는 가게다. 

 


▲비 오는 가을 아침 19세기 상점에 쇼핑왔다.


그 상점에서 허술해 보이는 포장인데 가격이 비싸서 머뭇거리다가 집어 온 캔디들이 너무 맛있어서 더 많이 사오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 설명되지 않는 그리움, 그리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낸 자연이 펼치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가을의 버몬트로 사람들을 꾸역꾸역 모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프턴(Grafton)


버몬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본 마을은 그래프턴이다. 이곳은 인구 600여명이 사는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인데, 남부에서 도망온 흑인 노예들이 잘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역사와 1,80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고즈넉한 모습으로, 버몬트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곳에서 단 하나뿐인 호텔(Lodge)에도 흑인 노예의 딸이 가수로 노래했다는 역사가 자랑스럽게 쓰여 있다.

 


▲1,800년대부터 있는 그래프턴 호텔의 19세기 스타일의 데코.

 

문명의 이기와 테크놀러지들로 모든 일상이 편리하고 빨라지고 있는데,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느리고 불편하게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가 보다. 뉴욕이나 보스턴의 마천루, 휘황찬란한 문화와 화려함이 시간을 앞서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버몬트주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효율적으로, 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해내야 하는 경쟁이 날로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어렴풋이라도 알지만, 일단 올라탄 시대의 흐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달려가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빠른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버몬트주를 찾는 것 같다.

 
개발과 발전보다는 옛 모습을 지키고 싶어 하는 버몬트 사람들이 가장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조용히 그러나 매우 격렬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불타는 가을 단풍과 함께 보고 느끼고 온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