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 용서받은 반역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작가.


워싱턴 디시를 둘러보는 관광코스에 꼭 포함되는 장소 중 하나는 알링턴 국립묘지이다. 포토맥강을 건너면 바로 만나는 버지니아주 영토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물론, 그리스 부자에게 시집갔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그리고 무명 용사들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봉사한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재클린 오나시스가 첫 남편 케네디 대통령 옆에 잠들 수 있게 해준 것은, 나이 많은 그리스 부자에게 시집가 버렸을 때 국민들이 느꼈던 섭섭함보다는, 나라를 위해 일하던 남편을 총탄에 잃은 사실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워싱턴 디시 중심부에서, 국립묘지가 있는 버지니아주 방향을 향해 가다 보면,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의 아름다운 언덕 위에 네오 클래식으로 지어진 하얀 저택이 보인다. 이 저택은, 남북전쟁 때 남군의 가장 존경받는 장군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소유였다.

 


▲알링턴 국립묘지.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가장 존경받는 장군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소유였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부인, 마사 워싱턴의 전남편 소생인 아들 John Parke Custis이 산 농지 1,100에이커에 그의 아들 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이 1800년대 초에 지은 건물이다. 주거용이기도 했으나, 자신의 양할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처럼 그의 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사 워싱턴은 자녀가 넷인 27세의 미망인으로 26세의 조지 워싱턴과 결혼했고, 둘 사이의 자녀는 없이 전남편의 자녀 넷을 함께 키웠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서, 버지니아 주지사(무려 3선 주지사였다)의 아들이며,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전설로 남은 탁월한 젊은이  로버트 리가 그 집안의 외동딸과 결혼하고, 이 저택과 농장으로 사용되던 1,100에이커 토지를 상속받게 되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이 이끄는 연방정부에서는 명망 있는 리 장군을 북군으로 영입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연방정부와 남군으로 편입된 자신의 고향 버지니아주 정부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고민하던 리 장군은 남군에 합류했다.

 

참전과 함께 저택을 떠난 리 장군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 없는 이 집은 전쟁 중에는 북군의 중요 요새와 작전지역으로 사용되다가, 점점 늘어나는 엄청난 전사자들을 더는 묻을 곳이 없어지자, 국립묘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종전 후, 반역자의 재산이라서는 아니고, 소유주가 재산세를 납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리 장군 사후에 그의 아들이 적법하지 않게 빼앗았다며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하여 현시가 4백만 불쯤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남북전쟁이 남부군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으니, 로버트 리는 당연히 적장으로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투표권이 박탈된 것 외엔 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가 오늘날도 명문으로 꼽히는 Washington and Lee 대학의 총장으로 존경받는 여생을 보냈다는 역사는, 워싱턴 디시의 많은 곳에서 보이는 리 장군의 저택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라의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 역사를 배워온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미국의 역사 중 하나이다.  요즘들어 인종 문제에 대한 쟁점이 더 첨예해진 후로는 남군 전쟁영웅들의 동상철거 등, 미국의 정서도 달라지고 있다. 


20세기의 베스트셀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백인우월주의와 노예가 있던 시절의 향수를 조장한다며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고, 군인들도 남군의 영웅들의 전투력 등을 연구하고 존경한다는 말을 드러내놓고 하지 못하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가장 존경하는 장군도 남부군의 스토운웰 잭슨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요즘 군인들은 그런 말을 기록에 남기지 않을 거 같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피폐한 남부를 재건하기 위하여 링컨 대통령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서와 포용으로 반란집단을 감싸 안은 리더십은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종전 후에 연방정부에 항거하지 않는 남부의 리더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 특별히 잔인한 행위를 했거나 계속 반기를 든 남부인들만 처벌받았다고 한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공평과 정의인 것은 맞다. 그런데도 재능과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인재들이 그들이 추구하던 세상이 무너진 후의 새로운 세상에 순응한다면, 표용하고, 사회의 이익에 공헌하도록 등용하고, 적이 되어 싸우던  백성들이 무기를 내려놓으면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해준 링컨의 리더십은, 여러 관점에서 계속 역사적으로 쟁점이 되겠으나,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정의라는 명분의 보복과 징벌이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최선이 아닐 수도 있고, 용서와 화합의 길은 감정적으로는 선택하기 힘드나, 꾸역꾸역 가야 할 “좁은문”일 수도 있다고 본다.


중론을 모으는 과정 등 적법한 과정을 건너뛰어 리더의 역량으로 결정하고 결행하는 것을, 영어표현으로 'executive decision'이라고 하는데, 리더로서 그런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들을 나도 직장생활에서 여러 번 경험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링컨의 포용이 공평과 정의에 어긋난다고 아우성치던 그 당시 의회의 목소리도 들리는듯하다. 

 


 
링컨 기념관에 앉아있는 고뇌에 찬 대통령의 모습. 그 뒤로 포토맥강 건너다보이는 리 장군의 저택을 보며, 지도자로 역사를 이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인데, 요즘 정치무대에 오르려는 사람들도 그런 막중한 무게감과 책임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본다. 

 


▲31세의 로버트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