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2020 미국의 대선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미국에 와서 산 지 40년이 되었고 투표권을 행사해온 지도 30여 년이 지났으나, 올해처럼 전국적인 관심과 열기를 체감한 대선은 처음이다. 완벽한 시력을 뜻하는 영어 표현으로 20/20 vision이라고 하는데, 2020년은 팬데믹과 함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쟁 같은 대선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최근 미국의 대통령 중, 재임 동안에도 막강한 지지를 받고, 그를 기억하는 국민들이 아직도 제일 그리워하는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다. 특히 경쟁자인 먼데일의 고향이던 미네소타와 꿋꿋한 민주당 텃밭인 워싱턴DC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한 그의 재선 성적표는 역대급 완승으로 기록된다. 믿고 따르고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지도자를 갖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바램일 것이다.

 

2016년, 정치판의 인지도가 굳건한 힐러리의 상대로 텔레비전 예능 프로에서나 보던 장사치 트럼프가, 레이건 대통령 이후부터 더욱 전통적인 가치관을 상징하게 된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나왔을 때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아연실색했다. 대부분의 여론은 힐러리의 승리를 예견했고, 트럼프처럼 점잖은 척도 안 하는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입 밖에 내보고 싶어도 못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 트럼프에게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 같고, 체면 불고하고 내 나라의 이익부터 챙기겠다는 그의 정책들에 투표로 답했다.

 

성경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정치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미국의 보수 신앙인들도, 다양성에 대한 열린 정책을 지지하는 민주당의 흐름을 경계하는지라 밉상이라고 여기면서도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다른 종교에 실례라며 Happy holiday라고 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Merry Christmas라고 해버리자”라고 말해주는 대통령, 트럼프에게 환호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던 트럼프의 기업 살리기 정책이 맞아떨어진 듯,  주가가 승승장구하며 경제적 호황을 누리자, 꿋꿋하고 열렬하게 트럼프를 미워하는 대다수 미디어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선 가도는 꽃길처럼 보였다. 흑백 갈등 사건과 역병이 미국을 덮치기까지는.

 

대선을 치뤄야 하는 바로 이 시점에, 다 이겨놓은 듯 보이는 이 판국에 코로나 팬데믹이 오다니, 흑인이 경찰에게 맞아죽다니, 트럼프 진영에선 너무 억울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바로 그 '억울함'이 트럼프를 패배로 이끈 원인이라고 보인다.

 

바이러스라는 침입자가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앓아누워 고통받게 하고, 경제를 마비시키고, 고립으로 몰아넣어 정서적 고난을 겪고 있는데, 이 상황을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다  대선에 미치는 영향의 관점에서만 대응해왔다는 인상을 주어왔다. 국민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역병을 이기기 위하여 전방위적으로 대처했다기보다는, '별거 아니다, 곧 이겨낼 거다'며 재난의 심각함을 덮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많은 사람을 대하는 공인이다보니, 영국 수상 보리스 존슨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코로나에 걸린 것이 보도 되었고, 마스크 쓰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던 트럼프도 대선가도 막바지에서 감염되고 말았다.

 

그의 투병 모습을 보며, 강인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까진 이해되지만, 그동안 코로나에 감염되어 고생한 사람들에겐 위로 대신 위화감을 주면서 그의 승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중증으로 넘어가야 투약하는 스테로이드 종류를, 부작용의 위험을 감수하고, 초기에 선택한 치료로 인해서 빠르게 상태를 호전시킬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이까짓 것쯤!'으로 보여주고 싶었겠으나, 감염이 되어 많은 고생을 한 국민들에겐 허탈함을 안겨줬을 것 같다.  

 

 

이렇게 어려운 재난 가운데 얼마나 고생하는지에 대한 위로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재난의 심각도를 부풀려서 필요 이상의 위기 상황을 선동해도 안 되지만 별거 아닌 듯 말하는 것도 국민들의 표심을 잃는 이유가 된 거 같다. 내가 당선되야 나라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수 있다는 집념은, 항상 무리수가 되고 만다는 것은 대한민국 근대사에도그 예가 즐비하다. 진정성과 대의를 위한 겸손이 느껴지지 않고 집권에 대한 노력만이 부각되면 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약화된다.

 

선거를 할 때 후보자의 용모나 태도보다 그의 정책을 잘 살펴보고 투표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과연 대다수의 유권자가 겉모습보다는 후보가 제시하는 정책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투표하는가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정책도 막상 실행과정에선 오류로 판명 날 수도 있기에  지도자에게 기대하게 되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인격과 대의를 향한 진정성인듯하다.

 

민주시민의 특권으로 행사한 나의 한 표와 상관없이, 결과에 승복하는 것 또한 민주시민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 중에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가 음모론의 확산이다.  ‘케네디 암살은 CIA가 한 짓이다’는 아직도 심심하면 들쳐내지는 음모론인데, ‘트럼프는 사실 러시아의 개입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바이든의 승리는 중국이 미 대선에 깊숙히  관여한 증거다’, ‘우편투표를 법정으로 가서 다시 열면 대선 결과는 뒤집힌다’ 등등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가 인터넷을 통하여 활발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듣기 좋은 말 같은 건 흉내낼 필요도 없다는 듯, 나쁜 남자의 전형 같은 막말 대잔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팔 걷어부치고 중국과 맞짱을 떠줄 리더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떄문일 것이다. 중국과의 대립 관계가 미국에 사는 아시아계 사람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으나, 공평과 정의는 간판에도 걸지 않은 공산체제의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는 것이 지구촌에 더 위험한 일인 것임에 공감하는 아시아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선거결과에 멋있게 승복하지 못하고 있는 트럼프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캐릭터와 일관성 있다고 보인다. 트럼프를 열렬히 미워하던 사람들 못지않게, 트럼프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열기도 만만치 않아서 패배의 실망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수세기에 거쳐 민주주의를 지켜온 나라이니, 이번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내내 민주당이 되란 법도 없고, 이번에 트럼프가 다시 역전을 했다 한들, 불과 4년 뒤엔 물러나야 하는데 이번 대선 결과에 목숨 걸 일은 없어야 한다.

 

지나온 역사의 주인이 계셨듯이 앞으로도 이 나라를 비롯한 지구의 역사는 주제자의 큰 그림 가운데에서 유유히 흘러갈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