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부자의 품격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누려보고 싶어서 노력하며 산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질이 확보되면 그 후엔 성취와 행복의 상관관계가 그다지 비례하지 않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계속 증명되어 왔지만, 자족하는 선을 긋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면 쉽게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을 수도 있다.

 

성공이나 성취란 개념에 속하는 것 중엔 명예도 있겠고 권력이나 부의 축적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어느 것도 이루기 쉽지 않고, 주어진 것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더 어렵다고 생각된다. 사회지도층은 아무래도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으니 하자가 들통나면, 더 준엄하게 대중의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유지비”가 비싸기 떄문이다. 그러나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라는 속담은 있어도, 만 가지 걱정이 싫어서 만석을 포기할 사람은 흔치 않을 거다.

 

미국의 부자들 중엔 자신들이 살던 고대광실을 박물관으로 남기고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굳이 찾아서 가진 않더라도 자동차 여행을 하다가 근처로 지나가면 들려볼 기회가 많다. 한적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동네에 숨어있는,  유럽에서 본듯한 캐슬 같은 저택들도 구경해볼 수 있다.  도시 가운데 있는 저택들은 그보다 규모는 적으나, 그래도 서민들은 거저 줘도 결코 유지할 수 없는 규모이다. 도시에 비교적 아담한(?) 주택을 가진 부자는, 자연 가운데 별장 같은 저택도 소유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중에 워싱턴DC에 위치한 부잣집, Hillwood estate를 소개한다. 아침에 먹는 시리얼 회사로 Post가 제일 크고 오래된 회사인데, Post cereal의 상속녀 Marjorie Post가 살던 저택이다. 구약성경 속의 만나에서 영감을 얻어 시리얼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그 유명한 회사이다.

 

▲Hillwood의 프랑스식 다이닝룸. 부자들이 성처럼 크고 아름다운 저택을 짓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릇과 가구 등을 갖추고 산 이유 중 하나는 함께 하고 싶은 손님들을 잘 대접하기 위한 위함이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저택은, 중국과의 화해 무드 가운데 선물 받은 판다로 유명해진 워싱턴DC 동물원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Marjorie Post의 세 번째 남편이 구소련 대사로 근무할 때 대량 수집한 러시아 왕정의 예술품들과 프랑스 왕궁의 가구들로 장식된 호사스러운 저택과, 아름다운 유럽식 조경의 정원이 방문객들에게 우아한 하루를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타지에서 온 손님을 모시고 여러 번 방문하여 진기하고 아름다운 많은 예술품들을 구경하며 눈 호강을 했으나 그보다 더 내 마음에 남은 것은, 여주인이 어떻게 손님들을 접대했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방문한 손님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방문 전에 미리 알아서 메모해두는 것은 물론, 머무는 동안 특별히 무엇을 선호했는지 꼼꼼히 메모해두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타월은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는지 까칠한 것을 선호하는지 어떤 와인이나 주류를 즐기는지 등등. 뉴욕주 호숫가의 별장으로 초대한 손님들에겐 개인 비행기까지 보내며 교통편을 제공하고, 손님들이 그곳에 머무르며 최대한의 환대를 받았다는 기억을 주려고 최선을 다한 기록이었다.

 

부자들이 성처럼 크고 아름다운 저택을 짓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릇과 가구 등을 갖추고 산 이유 중 하나는, 함께 하고 싶은 손님들을 잘 대접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집을 장식할 꽃들을 키우는 온실과 꽃밭.

 

많은 사회 심리학자들이 행복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왔다.  부자들의 호사스러운 주거환경에서,  만나보고 싶고 함께 해보고 싶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누리는 수단으로 자신의 부를 활용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심히 이룩한 부를 함께 누릴 사람도 필요하고,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다시 오고 싶어지는 경험을 주려고 노력한 것을 본다.

 

미국의 유명인사들의 프로필에는, 약력과 함께 그들의 종교적 배경이나 신앙의 정황과 그들이 중점적으로 기부하는 단체들에 대한 소개가 꼭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부의 나눔은, 사회적으로 거의 확고한 기대치인데, 어떤 목적과 비전을 가진 단체에 기부하는가로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잣대가 되곤 한다.

 

박물관으로 공개된 부자들의 저택에 가면, 그곳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던 유명인사의 목록도 볼 수 있다. 집주인이 교류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며 그가 무엇에 가치를 두었는지를 엿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 시대에 제일 잘나가던 테니스 선수를 초대하여 귀빈 대접으로 모시며 함께 테니스를 쳤다던가, 장 꼭도가 몇 달간 묵으며 함께 문학을 논하며 교류했다던가,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부부가 주말을 보내고 갔다던가, 유명한 연극배우들이 와서 주인에게도 한 배역을 맡기며 연극을 하면서 저녁 식사 후의 풍류를 즐겼다거나…. 교분을 갖기 원하는 유명인사를 초대하여 그들과의 친분을 누리기 위함이 멋진 저택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였음을 본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함께 누릴 사람이 있어야 즐거움이 배가된다고 한다. 기부가 함께 누림의 가장 고급 통로라면, 내가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최고의 환대를 베푸는 나눔은 부자라서 누리는 품격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어린 시절엔 타지에서 아무 연락 없이 친척들이 찾아와서 오래 묵는 일이 많았다. 숟가락 한 개 더 놓고, 이불하나 더 깔면 되는 한국의 옛 주거 환경이 아련하다. 요즘도 미국은 땅이 넓다 보니, 멀리서 온 친지들이 숙박하게 될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대비하여 대부분의 서민 가정들도 손님방을 준비해 놓는다.  침대시트와 타월도 새로 준비하고, 머무는 동안 몇 끼를 함께 하게 될지 계산해서 식사마다 무슨 음식을 대접할 것인지 식재료를 준비해놓고,  지내는 동안 쾌적하고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쓴다. Hospitality, 즉 손님을 정성껏 대접할 수 있는 주거 환경은 서민 가정의 주부들에게도 품격에 속한다.

 

우리 집을 방문해준 손님들에게, 정성껏 환대받은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부를 잘 나누는 품격 중에 하나인 것이다. 부자는 부자의 수준으로 서민들은 서민들의 수준으로...

 

▲정원이 보이는 아침 식사 공간. 포스트는 이곳에 장식할 꽃은 전부 이 집 정원에서 키운 것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럽의 예술품으로 장식된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