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포토맥 강변에서 띄우는 첫 편지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고,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나고 자라 종로구에 주소를 둔 학교들만 내내 다니다가, 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해서 바로 미국으로 온 나는, 고향에서 키워졌을 뿐 어른으로는 한국에서 살아보지 못하고 태평양을 건너온 지 올해로 40년째다.

 

포토맥강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디시를 흐르는 강으로, 내가 사는 동네 이름도 포토맥인데 이곳 한인들에게는 '부뚜막'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포토맥은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언어로는 "백조의 강”이라는 뜻으로, 포토맥은 강둑에 있던 원주민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닌, 국민학교 나온 것이 구세대란 증거라니, 그런데도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선 굳이 이렇게 써야 할 것 같다)를 같이 다녔던 포천좋은신문사의 김승태 편집국장의 초대로, 미국의 행정수도인 워싱턴디시 근교에서 숨어(?) 살던 아낙이, 불특정 다수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써보기로 어렵사리 마음을 먹었다.

 

편지는 친근함이 이미 깊어졌거나, 친밀함을 쌓아가고 싶은 상대를 향해 띄우는 소통인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딛고 불특정 다수에게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포천에서 발행되는 지방(지방=시골의 개념이 아니라, community, 지역공동체라는 의미) 신문이라는 친근감에서, 또한 맑은 샘물 같은 언론을 퍼 올려보겠다는 친구의 비전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지역공동체에 속하는 푸근하고 안전한 느낌은 타향에서는 평생 살아도 느껴볼 수 없는, 가장 아쉽고 그리운 소속감이기도 하다.

 

워싱턴디시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포토맥강.

 

옛날엔 배 타고 수개월 걸려야 오가는 거리에 살아도 요즘엔 인터넷으로 지구촌이 일일생활권이라서 고국의 소식과 문화를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있다. 바이러스로 집에 갇혀 지내며 2시간 넘는 긴 시간 동안 방영되던 TV프로, 미스터트롯을 아주 느긋하게 시청하면서 나를 포함한 열혈 시청자들은 포천의 아들 임영웅과 친밀해진 느낌이 들게 되었을 것 같다.

 

일상이 예전처럼 바삐 돌아갔으면 두 시간 넘는 프로를 편안하게 시청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들이 들려준 트로트는 암울한 시기의 대중들의 마음에 더 깊숙한 울림으로 다가와, 많은 사람이 트로트와 새삼스럽게 다시 만났을 것이다. 계속해서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그들이 출연하는 예능프로를 시청하면서,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출연자들과 보내게 되니 팬심을 넘어 그들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듯한 느낌도 들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임영웅의 고향 포천이 많이 부각되어 서울 근교지만 휴전선 쪽으로 가까운지라, 오랜 냉전의 세월 탓으로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로 다 용서되던 무자비한(?) 현대화의 물결로부터 보존되어 있었을 듯한 청정지역 포천에 대하여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다시 관심을 두게 되었을 줄로 안다.

 

세상의 모든 일들엔 타이밍이 잘 맞아야 이루어진다는 진리처럼,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세계가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는 2020년 8월 즈음에, 임영웅을 띄워 올려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선사한 포천에서, 맑은 샘물 같은 언론이 독자들에게 어떤 선한 영향을  흘려보낼 수 있는지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로, 그곳을 향하여 신나게 편지를 띄울 수 있을 것 같은 물결이 내 안에서도 출렁이기 시작한다.


글 쓰는 일로 평생을 살아온 프로페셔널들이 즐비한 인맥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를 불러준 친구의 이유는 그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가 감히 용기를 내어 응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인생을 살아갈 준비만 고향 땅에서 마치고, 언어와 문화가 낯선 땅에서 다시 뿌리내리고 어른으로서의 인생을 살아왔으나, 한국 사회에서는 성인으로 살아보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버린지라, 한국적인 잣대로 하면 “사회적인 연령(social maturity)”, 즉 사회에서의 기대치에 대비해서 일정 나이의 인간이 갖추고 있는 사회적인 성숙도가, 태평양을 건너던 시간에 멈추어 버린 인간이라는 희귀성이, 독자들에게 읽을만한 얘기를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근거한다.


가장 훌륭한 것과 악한 것은 한 끗 차이일 경우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언론(미디어)일 것이고, 때가 무르익어 포천의 지역사회에서 뜻을 모아,  좋은 신문을 시작하는 첫 삽질에, 종이비행기를 타고 함께 동참하게 된 기쁨으로 나는 지금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