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박선영 작가의 수필 '우중단상'

한국문인협회 포천지부 정회원, 2018년 대한문학세계문예지 등단

 

우중단상

 

 

계속된 열대야에 한낮 빗줄기 내리는 날 단지 아파트에 사다리차가 장롱이며 냉장고며 방수 포장으로 무장하고 빗줄기 사이로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분주하다. 오래된 20층짜리 고층아파트에 뷰는 기대도 못 하고 엘리베이터도 안 타는 2층으로 내 집 장만 설렘을 안고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가 한 방울씩 내린 비로 장롱만 비 맞지 말아야 한다고 비닐로 덮었던 생각이 난다. 이삿날 비가 오면 잘 산다고 하더니.

 

창문까지 나뭇가지로 가로막혀 그나마 눈앞에 있는 주차장도 가려져 화분마다 햇볕이 부족해 시들시들하다 죽고 마는 저층이다. 그래도 비 오는 날이면 이층의 진가가 발휘된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나무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모든 불만을 털어준다. 비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까지도 잎사귀에 터지는 빗소리에는 반응을 보인다. 가끔 여름이면 나뭇가지에 빗줄기 타고 들어오는 청개구리로 아이들이 소란한 날도 있었지만 ‘토도독토도독’ 잎사귀에서 창문으로 튀어 부딪치는 빗소리가 나면 귀보다 먼저 발이 앞선다.

 

아홉 식구 우리 집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은 두 개뿐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하나는 딸 셋 낳고 나온 장남 몫이고 하나는 중학생 언니 몫이다. 언니의 우산은 초등학생 동생인 날 동행한다. 걸어서 40분 걸리는 학교를 동생 바래다주고 가는 길은 1시간 30분 거리다. 질퍽질퍽 교복에 흙탕물 튀기면서도 비 맞는다고 불만 가득한 동생 씌우고 언니는 한쪽 손엔 가방 한 손엔 우산 들고 묵묵히 걸어간다. 언니의 실로 뜬 주판 주머니는 내 차지였다.

 

길 가장자리로 논 가 고랑엔 물이 가득 흘러넘친 비단실 같은 잔풀들의 흐느적거린 모습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보드라운 감촉에 소맷자락 비에 젖는 줄 모르고 해찰을 부린다. 순간 등짝에 장작불이 지나간 듯 언니의 손바닥이 내 등에 닿는다. 주판으로 물을 휘젖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물 먹은 주판은 놓을 수 없는데 새로 사줄 형편이 안 돼 작은집 오빠가 쓰다가 물려줘서 양초 문질러 귀하게 길들인 주판이다. 흠뻑 젖은 교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판만 붙들고 눈가에 눈물만 가득한 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비 많이 오는 여름철이 지나가고 가을볕에 맑은 날이면 마을 어귀에 어김없이 우산 수리공이 들어선다. 살이 나가고 찢겨나간 우산이 집마다 들고나오면 하나씩 고쳐지는 우산은 다음 해까지 고이 간직한 귀한 우산이 되었다.

 

비 온 날 하루 종일 바쁜 우산이 기둥 옆에 세워져 지친 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때쯤 내 차지가 된다. 떨어지는 빗소리를 마구 돌리면서, 맨발로 흙무더기길 밟으면 발가락 사이로 간지럽히며 삐져나오는 흙 몽우리들의 아우성도 듣고 물에 젖어 고개 숙인 풀잎들에 하이 파이브도 한다. 또 축 처진 나뭇가지도 힘껏 흔들어 튕기면 깜짝 놀라 쏟아내는 물방울도 낡은 우산 속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성이 된다. 어릴 적 내 우산이 없던 아쉬움인지 그리움 때문인지 지금도 난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쓰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베란다 한 귀퉁이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집들이 선물로 들어 온 도자기 화분에 서양란 대신 네 식구인 우리 집 우산 아홉 개가 배가 터지게 꽂혀있다. 각양각색 중 마음에 든 우산만 비 오는 날 간택이 되고 몇 년째 비도 안 맞아본 우산이 더 많아 정리하고 싶어도 우산 없던 어린 시절 생각나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오후 비 소식에 우산 챙겨주니 큰 딸래미 작은 가방에 쏙 들어간 3단 우산이 웃는다.

 

 

박선영

아호: 초연(草然) , 포천 소흘읍 거주

현)인지책놀이교육사

서정대학교 사회복지학전공

2018년 대한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2018년 대한문학세계문예지 시 등단

2022년 포천사랑백일장대회 운문부분 장려상

2023년 반월제 백일장 대회 시 부분 우수상

(사)한국문인협회 포천지부 정회원

포천문예대학 시. 수필. 소설 수료

2023년 10월 포천소식지 시 게재

2022~2024년 한국예총 시화 다수 전시

2019~2024년 포천문학전집 시, 수필 다수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