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유예숙 수필 '빈 둥지'

한국문인협회 포천지부 이사

 

 

빈 둥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팔월의 아침 풍경이다. 한눈에 밭작물을 다 알아볼 만큼 작은 밭이다. 뜨거운 기온을 피해 아침 작업을 하려고 농부는 분주하게 서두른다. 황새처럼 하늘로 뻗친 궁둥이만 보이니 남자 뒤태가 우습다. 좀 떨어진 곳에는 작물에 가려진 왜소한 몸으로 두 손은 연신 바쁜 시누님이다. 아, 오늘도 노구를 이끌고 큰 시누님이 밭에 나와 계시구나, 가슴이 아릿해진다.

 

동네 입구에 출근길 차들이 오가는 큰 도로가 옆, 흙먼지 날리는 작은 밭에서 연신 무언가를 골라 따내고 있다. 한낮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 시간에 일일이 하나하나 따야 하는 까닭은 조금만 시기를 놓치면 봉선화 씨방처럼 단단한 씨앗이 사방으로 튀는 녹두가 분명하다. 까맣게 옷을 갈아입으면 잘 여문 것이니 농부의 손길을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딱히 녹두밭인가 하면 또 심어 있는 작물이 여럿이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폭염을 견디지 못해 불쏘시개 해도 좋을 만큼 바싹 말라 추레한 옷을 입은 옥수수 대도 서 있다. 들쭉날쭉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 불긋하고 꺼뭇한 키 작은 수수가 사춘기 얼굴로 서 있고,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 상점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는 볼 빨간 토마토가 실로폰을 치고 있다.

 

또 다른 작물도 보인다. 언제나 꽉 찬 속을 보여 주려는지 말괄량이 치맛자락 팔랑대듯 작은 바람에 콩잎도 춤을 춘다. 새색시 청 저고리 다홍치마 같은 고추며 세상에 많고 많은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멘트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잘 살라’는 조선 파도 뽀얀 분칠을 하고 임 기다리듯 서 있다.

 

바깥세상 궁금해하는 녀석은 지하에서 두 집 살림 꿈꾸는 잎 무성한 땅콩이다. 녹두, 옥수수, 수수, 토마토, 콩. 고추, 파, 땅콩, 일일이 열거해도 모자란 놈들이 저마다 어우러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지런한 밭 주인이 확실하다. 딱히 어떤 밭이라고 말하기 모호하니 농부는 그저 저 밭을 일러 텃밭이라 부르리라. 온통 풍요로운 텃밭을 보노라면 내 것 인양 마음이 가득해지고 서둘러 가을이 기다려진다.

 

보통 이런 풍광은 보기 좋은 그림일 테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구순 가까운 고부라진 어머니와 머리 허연 아들의 정황을 알고서야 마냥 좋은 그림이라 할 수가 없다. 남편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젊은 한때 두 분은 신장(腎臟)까지 나눈 사이라고 했다. 몸의 장기를 나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보통 일은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이라 해도 신체 일부를 떼어 준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아들의 생명과 직결된 긴급한 사안이었으니 예정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셨으리라.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만으로도 가슴 뭉클해 온다. 부모라고 모두 다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고 가혹한 후유증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부를 나누는 일에 작은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없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사가 편치 않다.

 

뒤늦게 어머니와 동거를 시작한 아들은 부친과 사별한 뒤에 노모를 위해 함께 지내오고 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노모와 지내는 것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웃으로, 또 늙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운 남편의 피붙이를 바라보아야 할 내 입장에서는 처자식과 떨어져 있는 늙어가는 아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이제껏 두 분 양주께서 고향 집을 지키다 홀로되신 지 일 년 남짓이다. 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있을 처소가 마땅치 않아 들어와 사는 듯 보여 더 그럴 것이다.

 

내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다가다 들여다보고 고작 가끔 말벗해 드리는 게 전부다. 외출에서 돌아오던 어느 봄날, 뭐 하시나 궁금해서 들렸다는 나를 반기신다. 시누님은 농사에 필요한 이것저것 씨앗도 챙기고 고추며 완두콩 오이 덩굴에 세울 지지대 준비도 하고 할 게 한둘이냐 하신다.

 

문득 영감님이 생각 나신 듯 “내가 그 양반 살아생전 잘한다는 소리보다 그저 타박만 했었어.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예전 일들이 후회되시는 건지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 내신다. 철마다 찬찬하게 미리미리 준비해 둬 아쉬운 줄 몰랐던 농사일이며, 집안일이며 지금 혼자 알아서 해야 하니 어느 때가 적기인지 몰라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고 하신다.

 

모르긴 해도 생활 전반에 걸친 모든 살림을 보살펴주던 영감님이셨다. 전기요금 전화요금 온갖 세금 납부며 일용품을 사거나 병원에 약 타다 주는 일까지 아쉬움이 어디 한둘이랴. 이제껏 당신이 표현하지 못했던 말‘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도 여태 못했다고 “늙은이 주책이라 흉보겠지만 보고 싶을 때도 있어” 울음 반 웃음 반으로 민망함을 대신하신다.

 

“하나 있는 아들이 그 양반 반의반이라도 따라준다면 좋으련만” 일일이 도와 달라 말하려니 답답하고 맘에 들지 않는가 보다. 어쩌면 처자식과 떨어져 살고 있는 것도 어머니는 더 속상하고 안쓰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시니 “안 해보던 농사일인데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마음을 돌리신단다.

 

가끔 막내 동생인 남편이 누님에게 힘들게 농사일 그만하시고 전답 다 정리하고 서울 있는 딸자식들과 함께 편안하게 살라는 권고하고 나도 옆에서 거들지만, 이것저것 거둬들이고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낙으로 살면 된다고 하신다. 딸들이 용돈도 꼬박꼬박 보내오고 전화도 자주 하고 먹을 것도 사 보내니 일절 걱정하지 말라시던 분이다. 영감님 이야기로 한참 속엣말을 꺼내놓으시더니 후련해지신 걸까. “공연히 바쁜 사람 붙잡고 또 주책 떨었네”라고 내 등을 떠미신다.

 

자식들도 여럿이고 어머니께 잘한다니 걱정 없겠다 싶지만, 한집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가까이 사는 나로서는 걱정에서 놓여날 수가 없다. 노부부가 함께 계실 때보다 병원 출입도 잦고 부쩍 수척해진 얼굴에 기력도 떨어지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자식들도 그럴 것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늙은 어머니가 안타까운 자식들은 애꿎은 전화만 해 댈 것이다. 전화기 너머 자식들 걱정할세라 “나는 괜찮다.” “아무 일 없이 잘 있다.” 마치 수도꼭지 틀면 나오는 물처럼 한결같은 이야기, 바로 누군가에 어머니다. 자나 깨나 자식 입에 넣어 줄 농작물 수확을 위해 남은 기력을 다 써가며 정성을 들이는 그 마음을 자녀들은 알까. 예쁜 도둑이라는 당신 자식들에게 아까운 게 뭐가 있으랴. 퍼주고 퍼주어도 더 주고 싶은 부모 마음을.

 

유년 시절, 아니 조금은 젊은 시절, 뜨끈뜨끈 쩔쩔 끓는 방에서도 혼자 있으니,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등 돌리면 남이라는 무촌, 티격태격 옥신각신하다가도 서로 등 긁어 주고 말벗 되어 살아온 세월만큼 상실감은 더 컸으리라.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기에 감히 짐작만 할 뿐이다. 혼자 남겨지는 상상은 하지 말자. 오늘따라 가족들이 더 기다려진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자’ 다짐도 하면서.

 

 

 

유예숙

*사진 지도자, 사진작가, 시민기자, 수필가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포천지부 사무국장

*포천시 우수시민기자

*(사)한국예총경기도연합회 포천지회 대의원

*(사)한국문인협회 포천지부 이사

*에세이문예사 회원 *달포회 회원

*2016 포천사랑 백일장 운문부 장원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상 수상

*2017 포천 기,예 경진대회 산문부 우수상 수상.

*2019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상

*2023 (사)한국예총 표창장 수상

*2024 달포 수필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