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사람들

'작은 거인' 이천희의 눈물

'태사모 봉사회 10주년'과 막내아들 결혼식 앞둔 무속인 이천희 회장이 처음 꺼낸 속내 이야기

 

 

 

가산면 부유한 집안 외동딸로 태어나

 

'작은 거인' 이천희 회장의 하루는 새벽 4시 50분부터 시작한다. 매일 똑같은 기상 시간이지만 요즘 들어 그는 몸과 마음이 바빠 긴 하루가 오히려 짧다. 태사모 봉사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가 9월 9일로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데다가, 막내아들 결혼식도 17일로 잡혀 있어 이것저것 챙길 일에 쉴 틈이 없다.

 

이천희 회장은 평소 워낙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많은 여자다. 매일 바쁘게 지내는 요즘에야 그럴 일이 없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잠시라도 여유가 생기면 지난 일들이 꿈같이 떠올라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혼자 있을 때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남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는 일부러 더욱 부지런을 떤다. 

 

이천희는 현재 살고 있는 가산면 마전리 부근에서 1961년 아산 이 씨 부유한 대종가 집의 이상길 씨(이 회장이 27세 때 작고)와 최동금 씨(4년 전 작고)의 10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친정어머니는 10남매를 출산했지만 위로 다섯 형제들은 5~6세 무렵 홍역과 역병 등으로 일찍 사망했고, 나머지 4남 1녀 중 막내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육간대청 고대 황실 같은 가산에서 제일 큰 집에서 귀하게 자랐다. 얼마나 부자였냐고 물으니,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집안일을 하던 노비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어른들로부터 "천희는 손끝 재주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는 예능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미술, 수예, 뜨개질, 글짓기, 웅변, 고전무용, 전통무용 등에 능통해 대회에 나가면 상이라는 상은 모조리 휩쓸어 왔다. 또 그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포천여고 학생이 주로 '포천 화동' 역할을 했는데, 워낙 예쁘고 뛰어난 용모의 이천희가 등장하고부터는 '포천 화동' 역할은 그의 독차지가 됐다. 화동은 국회의원이나 군수가 당선되면 꽃을 전하는 어린이 역할. 이천희는 지금도 "당시 군민의 날은 10월 4일이었는데 그때마다 화동으로 불려 나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어린 시절 이천희의 할머니는 집안에 상스러운 일이 생기면 굿을 하곤 했다. 식구들이 감기만 걸려도, 손주들이 배가 아파도 굿을 했다. 어린 이천희는 그런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부여잡고 밤새도록 굿 구경을 좋아했다. 동네에 굿판이 벌어지는 날이면 학교 끝나고 청소도 안 하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서 집안에 책가방을 팽개치고 굿 구경을 갔다. 어린 이천희는 당시 어느 집에서 언제 굿을 한다는 것도 모두 꿰고 있었다. 

 

굿을 하던 무당도 어린 이천희가 밤새도록 굿하는 것을 지켜보고 앉아있으면 신기한 듯 한참을 빤히 쳐다보다가 "너 이다음에 크면 무당 된다"거나 "나라의 큰 만신 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이천희는 이 말이 싫지 않았고, 굿이 끝나면 사과나 배 한 알이라도 손에 들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당시 가산삼거리를 나가면 오색천이 울긋불긋 걸려있는 서낭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이집 저집에서 굿을 한 뒤 고수레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 또래의 아이들은 귀신이 있다고 무서워해 서낭당 근처에도 못 갔지만 이천희는 그 서낭당 앞 돌각신에 턱 걸터앉아서 그곳에 가져다 놓은 사탕이나 약과를 맛있게 먹었다. 

 

 

 

 

서른한 살에 신내림 받고 무당 돼 

 

이천희는 가산초와 경복중을 거쳐 고교는 의정부로 진학했다. 워낙 예쁘고 재주가 많아 장차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던 소녀는, 그러나 고1 무렵인 17살 때 갑자기 신병이 들게 된다. 매일 원인도 없이 온몸이 아프고 몸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귀에서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도 병명도 없고, 주사를 놔도 주삿바늘이 휘거나 부러지면서 살에 들어가지 않고 퉁겨져 나왔다. 몸은 퉁퉁 붓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학교마저 자퇴하고 만다.  

 

어머니 최동금 씨는 이러다가 외동딸 죽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이천희의 할머니처럼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굿이 진행되는 것을 본 이천희는 어렸을 때 할머니 손을 잡고 굿 구경을 다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굿을 하는 동안은 그렇게 아프던 몸이 멀쩡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스스로 놀랐다.

 

이천희는 신병이 들어 고생했지만, 동네 총각들은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항상 주위에 들끓었다. 그는 23살 때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출신의 여섯 살 위의 황화열 씨와 결혼했고, 슬하에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다가 31살 때인 91년 마침내 신을 받고 무당이 됐다. 그때 막내아들은 겨우 4살이었다.

 

신을 받기로 최종 결심한 것은 현재 37살이 된 둘째 딸이 4살 때 집 앞에서 교회 봉고차에 치여 배가 터지고 하반신 대퇴부 뼈도 거의 바스러지는 큰 사고를 당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아이를 둘러업고 포천도립병원(현 경기도포천의료원)으로 달려갔다. 담당 의사는 강희중 박사(현 강병원 원장)였고, 이천희는 매일 강 박사를 찾아가 "우리 딸 살려주세요"라며 눈물로 애원했다. 다행히 둘째 딸은 1년 반을 입원한 뒤 완치해 퇴원했다.

 

이천희는 이 일을 계기로 신을 받기로 결심한다. 신을 거부하면 그 대신 둘때 딸이 신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고, 또 다른 자식들도 계속 사고를 당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는 3남매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짚을 들고 불 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심정이었다.

 

내림굿을 하고 신을 받기로 한 날, 남편 황화열 씨는 자기 부인이 무당이 되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날 남편은 이천희를 집안에서 끌어내 자동차에 태우고 한참을 달려 수원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이곳은 비포장도로였는데 남편은 휘발유 1통과 밧줄까지 준비해서 자동차에 싣고서 절벽 위에 차를 댔다. 밧줄로 목을 매던지,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자동차와 함께 떨어져 죽자고 위협했다.

 

밤이 깊어 겨우 남편 손에서 벗어나 댕기 머리에 소복을 입고 맨발 차림으로 내림굿하는 집에 돌아왔더니 집안은 이미 난리였다. 어머니는 사위가 자기 딸을 죽이려고 데려갔다고 실신해 있었다. 그날 이천희는 내림굿을 받고 그렇게 무속인이 됐다. 남편은 그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부인 이천희가 무당이 된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법당을 때려 부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곁에서 이천희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집안에 노비까지 있었던 부유한 집이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큰오빠까지 사업이 망해 집안의 재산은 거의 탕진됐다. 게다가 집을 떠나 사업하던 남편마저 IMF로 그나마 있던 재산마저 홀딱 날리고 빚까지 지고 집에 돌아왔다. 이천희와 남편, 그리고 아이 셋, 둘째 오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친 자식처럼 키운 조카 딸 둘, 어머니와 두 분 오빠까지 열 식구는 모두 집 밖 거리로 나앉아야 했다. 열 사람 중 돈을 버는 사람은 이제 방금 무당이 된 이천희 혼자였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만 다섯이니 학비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을 학교는 보내야겠기에 이천희는 군청으로, 면으로 도움을 청할 만한 지인들을 찾아가 학비라도 지원받으려고 부탁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가 무당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마다 그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큰딸 지연이,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훌륭해"

 

하루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큰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연이 어머님, 상담할 게 있어요." 딸애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학교에 가니 담임선생님은 큰딸아이를 전학시키자고 권유했다. 그 이유가 기가 막혔다. 반 친구들이 지연이 엄마가 귀신이 들렸다고 왕따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지연이 머리를 잡아 흔들고, 심지어는 지연이 도시락에 침까지 뱉은 적도 있어요. 또 옷과 책도 찢으며 괴롭힙니다"라며 아이들을 야단치고 타일러 보아도 지연이가 따돌림을 심하게 받으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그러니 지연이 엄마가 무당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의정부 학교로 전학시키는 게 어떻겠냐는 것. 마침 담임선생님이 의정부에 살고 있으니 자기 집에 지연이를 데리고 가서 돌봐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고도 집에 와서는 한마디 불평도 안 했던 큰딸. 기가 턱 막히고 가슴이 북받치는 서러움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눈물만 흘러내렸다. 또 지연이 담임 선생님의 고마움 때문에도 눈물이 흘렀다. 그때 큰딸아이가 말했다. "어머니, 선생님. 저는 괜찮아요. 전학 가지 않을래요. 저는 엄마가 무당인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라면서 "우리 엄마는 대통령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에요. 대통령은 앞날을 못 보지만 엄마는 앞날을 볼 수 있는 훌륭한 분이세요. 저 전학 보내지 마세요." 이제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의 말에 이천희와 선생님과 큰딸 세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한참이나 펑펑 울었다.

 

다행히 이천희의 세 남매와 돌아가신 작은 오빠의 두 딸은 모두 무탈하게 자랐다. 모두 대학도 졸업했고 결혼도 해서 아이들도 낳아 행복하게 산다. 이제 17일이면 자식 가운데는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이 결혼을 한다. 그는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가족 일에서 벗어난 이천희는 이제부터는 자신의 평생 숙원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봉사 일에 더욱 매진하려고 한다.   

 

10년 전부터 시작한 태사모 봉사회는 이제 60여 명의 회원들이 매달 65가구에 10kg 쌀과 생필품을 전해준다. 이번 달로 103회째다. 이천희가 무당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남편은 이제 태사모 봉사회를 적극적으로 돕는 훌륭한 조력자가 됐다. 봉사하면서부터는 이천희는 남편과 말다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웃는다.

 

키 150cm, 몸무게 48kg의 작고 아담한 체구의 이천희 회장.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꿈 많던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어 온갖 서러움을 겪었던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 지내온 지난 60여 년의 세월,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다는 그는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그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무녀로서 인정받아 무형문화재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 조그만 꿈이다. '작은 거인' 이천희. 그의 눈에서 이제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