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스페인 독감이 남긴 예술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150cm보다 작은 키의 프랑스 출신의 미국작가 루이스 브루즈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예술은 스페인 독감과 관계가 있다.

 

루이즈 브루즈아(Louise Brougeois)는 프랑스 파리에서 1911년에 태어나, 1938년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뉴욕으로 이주해서 2010년 98세로 사망할 때까지, 주로 초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설치미술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한 아티스트다.
 
2018년 늦여름 우연히 내가 사는 동네에 신흥 부자가 새로 지은 미술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들이 사후에 자신이 살던 저택을 박물관으로 기부하여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은 많이 가봤다. 한적한 주택가에 거의 숨어있듯 위치한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규모일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글렌스톤(Glenstone)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현대미술관은 그 규모와 건축의 아름다움과 소장품들이 세계적으로 손꼽힐 수준이다. 명실공히 워싱턴 DC 근교의 숨은 보석이다. 부자들의 여우 사냥터로 남겨져 있던 230에이커(1에이커는 1200평 정도)의 넓은 땅을 구입하여 아름답게 조경하고, 건물 자체로도 예술품인 현대식 건축물의 미술관을 지었다. 


설립자는 1956년생으로 우리 동네 출신의 사업가였다.  부동산과 온갖 돈 될법한 사업들에 성공하여, 거의 트럼프의 자산 수준까지 부를 축적했다.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 4일만 일반에게 미술관을 무료로 공개하면서, 자신이 일군 부를 사회에 다시 돌려주기 위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부의 축적 과정에서 남의 눈물도 뺀 사건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석한 글도 읽은 적이 있었다.


 글렌스톤에는 신관과 구관이 있는데, 비교적 적은 규모의 구관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만 특별전으로 기획하고 전시한다. 더 넓게 새로 지은 신관에는, 2차대전 후에 활동한 현대 작가들 중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들이 한 개씩 전시되어 있어 최고가의 현대미술 샘플관같다고 느껴졌다. 좀 야박한 눈으로 보니 미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라기보다, 부자가 오만가지 최고급 물건들만 사들여서 쫙 늘어놓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고가품을 무료로 관람하게 해줘도 구시렁거린다. 

 

▲글렌스톤 신관. 현대 작가들 중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들만 한 개씩 전시한다.


주택가에 숨어있는 이 고급스러운 현대미술관을 우연히 발견한 기쁨과 감동 가운데에서, 구관에서 특별전으로 전시 중인 루이즈 브루즈아의 작품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는 통념으로 굳이 찾아다니며 즐기진 않았던 나에게, 처음 만난 그녀의 작품들이 푹 뚫고 들어왔다.

 

작품을 제작 연대별로 전시한 동선을 따라가다가 그가 98세에 작고하기 전에 그린 유작들, 'I give everything away' 연작 시리즈에서 그 강한 찔림이 온 거 같다. 라틴어로 punctum이라고도 하는 '찔림.' 예술이 우리 영혼을 푹 파고들 때 새로 찔린 상흔 같기도 하고, 있던 상처를 치유하는 것 같기도 한 현상을 그렇게도  표현한다고 읽었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로 인생샷, 인생 맛집, 인생 영화 등이 이런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고 생각된다. 


98세 예술가가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고백하며 그린 그림이, 정신과 환자들 미술치료의 가장 예술적인 예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브루즈아의 작품활동은 스스로 필요한 미술치료로 여겼다고도 한다.

 

 ▲루이즈 브루즈아가 98세로 작고하기 전에 그린 유작들 'I gave everything away' 연작 시리즈. 필자에게는 인생 최고의 감동작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다녀온 후, 현대미술과의 진한 만남을 안겨준 작가의 삶을 공부했다. 작가의 부모는 파리에서 tapestry(다양한 색채와 문양으로 직조한 벽걸이) 갤러리를 운영하였다. 오래된 작품들을 수선하고 복원해 판매했기에, 복원할 카펫의 밑그림이나  망가진 부분을 다시 짜는 가업을 브루즈아도 배우며 성장했다. 


작가가 열 살 때쯤, 어머니가 그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회복하지 못한 채로 몸져눕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후 10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그 시절을 살았는데, 보모 겸 가정교사였던 여자와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충격과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싶기도 하던 어린 시절을 거쳐온 복잡한 심리가, 마치 미술치료 같은 과정을 거치며 관객에게도 치유의 힘으로 다가오는  작품을 빚어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이즈 브루즈아의 특별전이 열리는 구관 전경.

 

나 또한 어린 날에 늘 병약했던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조숙하던 감성으로 느끼던 성장통들이 그의 작품을 통하여 다시 깨어나 공감대를 형성하며 신비한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성장 배경을 알고 보니, 난해해 보이는 작품들에  절묘하게 표현해낸, 작가의 번득이는 예술성이 느껴져 짙은 감동으로 작품의 스토리가 내게 걸어들어오는 듯 했다. 


자신의 이야기나 철학, 신념 그리고 감성을 시각적 매체를 통하여 관람하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미술은 역사와 문학을 품은 '인문학'적인 예술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작품에 담긴 내용이 걸어 나와 나의 영혼을 뚫고 들어오는 경험을 찾아 헤매는 것이 미술관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150cm도 안되는 키의 프랑스 출신의 미국작가 브루즈아는, 70살이던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인전을 하면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정상에 올랐다고 본다. 여성의 신체의 어느 부분을 연상케 하는 작품들을 통해서 외친 작가의 많은 이야기는 페미니즘 주류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세계를 페미니스트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에게는 동감할 수 없다. 상대적, 비교적 관점에서의 여성의 인권을 외쳤다고 보기엔 가족 간의 끈끈함과 절절함이, 여성 특유의  따스한 감성들이 더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브루즈아는 거의 80년 가까이 왕성히 작품활동을 해서, 피카소처럼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갔다. 한국에도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Maman(프랑스어로 엄마)을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작품은 거대한 거미의 조형물이다. 거대한 거미 형상의 제목이 엄마라니… 그녀의 어머니는 tapestry를 수선하고 복원하느라 직조하는 일을 하여, 거미줄을 직조하는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린 것이다.

 

거미는 우중충한 모습이지만 생태계에서는 인간에게 해로운 벌레를 잡아먹는다. 엄마라고 이름 붙은 거대한 거미는 또한 배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알을 품고 있다. 따스한 모성을 표현하여, 이 작품은 관객의 마음에 포근하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세계 미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의미를 가진 엄마(maman은 엄마, 어머니는 mere)를 생각해보게 하는 작가의 조형 작품은, 스페인의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도 그곳을 상징하는 작품처럼 설치되어 있다. 
 


▲대한민국 리움미술관이 100억정도로 구입했다는 마망(maman).  작가는 엄마를 거미로 표현하고 있다.

 

브르주아와의 만남은 작품이 준 커다란 감동과 함께, 작가의 삶을 공부하다가 스페인 독감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되었다는 의미도 적지 않다. 불과 100년 전 2년간 천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남기며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사건에 대하여, 그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는 것이 거의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스페인 독감에 대하여 여러가지 문헌을 찾아보게 되고 관심을 두고 있다가, 2020년으로 들어와 코비드19을 만나게 되었다. 중세 암흑기가 끝나게 된 주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흑사병은 역사 시간에 배워 알고 있으나, 근대사에 더 많은 인명을 잃은 사건에 대하여 왜 우리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을까가 커다란 의문이었다. 1차대전도 결국 스페인 독감의 창궐로 인하여 흐지부지 종전되었다고 하던데 왜 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없을까.  


브르주아의 엄마가 10년간 앓아눕지 않았다면 어린 소녀가 겪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작가의 작품으로 남아서, 그 사건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혹시 나만 몰랐던가 하여 주위에 물어보니, 흑사병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스페인 독감에 대하여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문헌 속에서 읽은 바로는 기미년 3.1만세 사건 당시에도 스페인 독감이 한반도에 창궐 중이었다고 하던데, 3.1운동에 대하여 배울 때 이 역병의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유난히 본인과 가족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시던 친구 아버님으로부터 어린 나이에 어머님을 스페인 독감으로 잃으셨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근자에  친지들에게 스페인 독감을 들어봤냐고 묻고 다니다가 듣게된 유일한 대답이었다.

 

친구 아버님은 살벌한 입시지옥에서 자라던 친구에게도, 공부하느라 방구석에 있지 말고 야외에서 뛰어놀며 건강해야 한다고 늘 말씀 하셨다고 한다. 친구가 '우리 아버지는 공부하면 혼내셔…'라고 말할 때마다 같이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를 어린 시절 잃어서, 사랑하는 가족을 병으로 잃게 될까 봐 그러셨을 거라는 유추를 해본다.  알게모르게 스페인 독감이 우리 삶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엄청난 역병도 100년 후 사람들은 모르게 될까? 아니, 이런 재난이 끝나 일상이 회복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살아가게 될까? 소중한 사람을 잃었거나 코비드를 앓고 일어난 사람들은 아마도 좀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아마 많은 예술가들은 코비드를 예술의 테마를 삼게 될 테고, AC를 After Covid로 표현되는 팬데믹 이후의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과 달라진다고 하니, 역사책에 진한 잉크로 기록될 것 같긴 하다.

 
우리는 망각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도 하지만, 이 재난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과 같은 무게로, 이 재난을 오래 기억하며 살아가길 소원한다.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으니 준비하고,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언제라도 거두워져 갈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뒷세대들이 교훈으로 삼아서 문신처럼 간직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