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호조참판 지낸 윤필병 문집 '무호암집'

파평 윤씨 판서공파 회장 윤경환 교수가 최초 공개한 '무호암집', 학계에서는 "포천의 보물 가치 충분하다"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하는

윤필병의 문집 '무호암집'(無號菴集)

 

파평 윤씨 판서공(휘 세징)파 종중(이하 '종중'이라 한다)에서는 지난 6월 19일 포천시산림조합 문화센터에서 윤세징 일가 묘역 조사 중간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 조사를 담당한 강남대 명예교수인 홍순석 교수팀은 입향조인 23세 윤세징과 그의 두 아들인 24세 윤이익과 윤이제의 묘역과 석물들의 우수성을 확실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선보이는 자리를 만들었다. 

 

한편, 이날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종중회장인 윤경환 단국대 기계공학과 명예교수가 이 자리에서 두 가지의 의미 있는 발표를 진행하였다.

 

첫째는 이번 학술 조사 과정에서 단장이신 홍 교수님의 제안에 따라 입향조인 23세 윤세징과 24세 윤이익의 탁본을 추가로 만들어 현재 설립을 추진 중인 포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하는 행사를 했다. 둘째는 종중에서 직계 조상님들의 의미 있는 문화재를 발굴하여 소중하게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작업 끝에 최근 사가에서 찾아낸 27세 윤필병의 문집인 '무호암집'(無號菴集)의 존재를 그날 참석한 포천시 향토 문화재 담당자 및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무호암은 윤필병의 호다. 그는 호조참판까지 지냈고,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아주 뛰어난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우리 포천이 낳은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나 문집이 현재까지 한 점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1792년 정조가 실시한 어고인 '성시전도시'와 '금강일만이천봉'에서 윤필병의 글이 실린 기록이 발견되었다. 윤경환 교수는 이번에 윤세징 연구하던 중에 자신의 집에서 9권 6책으로 된 귀중한 서책 무호암집을 찾아냈는데, 이 책자는 원문 내용을 잘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책으로 역사적, 사료적 및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윤 교수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앞으로 무호암집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 이 책자는 윤필병과 함께 우리 포천시의 자랑스러운 보석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으며 포천의 보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포천 입향 후 대표적인 파평 윤씨

판서공(휘 세징)파 종중 인물들

 

파평 윤씨 판서공(휘 세징)파 종중 입향조인 23세 윤세징(尹世徵:1595~1631)은 백사 이항복의 사위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큰아들인 24세 윤이익(尹以益, 1616~1689)은 나주목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인 윤이제(尹以濟, 1628~1701)는 문과에 급제 후 어영대장, 한성부 판윤, 네 번의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낸 포천이 낳은 대표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특히, 조선 중기의 인물로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25세 윤기경(尹基慶, 1669~1726)도 문과에 급제 후 진주목사를 지냈고, 26세 윤사완(尹師完, 1671~1726)도 문과에 급제했다. 우리가 주목하는 27세 윤필병(尹弼秉, 1730~1810)은 1767년과 1786년 두 차례 문과에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선치를 했다 .

 

윤세징이 포천에 입향한 이후 직계 자손들이 24세에서 27세까지 4대에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고, 약 20명의 소과(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했음에도 상당히 조용히 지낸 가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에는 포천초등학교를 설립한 윤흥순(尹興淳, 1884~), 포천에서 제2, 3, 4대 국회의원을 지넀고,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윤성순(尹珹淳, 1898~1971) 등이 종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윤필병의 상세 연혁

 

윤필병은 1730년(영조 6년) 포천에서 태어났고, 1810년(순조 10년) 포천시 군내면 용정리에서 사망했다. 자(字)는 이중(彛仲)이고, 호(字)는 무호암(無號庵) 또는 무호당(無號堂)으로 알려져 있다. 증조부는 위에서 소개한 파평 윤씨 24세 윤이제, 조부는 25세 윤기경이다.

 

부친은 사복시정을 지낸 26세 윤사용(尹師容, 1690~1758)이며, 어머니는 이제항(李齊沆)의 딸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홍길보(洪吉輔)의 딸인 풍산 홍씨(豐山洪氏)이고, 둘째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슬하에 1남(응한 : 應漢) 1녀를 두었다. 홍길보는 다산 정약용의 부친인 정재원의 외조부이며, 정재원, 윤필병, 권이강의 스승이기도 하였는데, 윤필병과 권이강을 차례로, 사위로 삼았다.

 

윤필병은 어려서부터 필법이 곧고 반듯하여, 11세 때는 강세황(姜世晃)이 윤필병의 글씨를 보고는 왕희지(王羲之)의 후손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자라서 경사(經史)를 익히고 백가서(百家書)를 공부하니 학문이 더욱 넓고 깊었으며, 특히 시문에 능해 매양 시를 지으면 원근에서 전송(傳誦)하였다고 전한다.

 

윤필병은 1765년(영조 41) 사마시에 합격했고, 176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특이한 것은 윤필병이 1767년 과거시험을 보던 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문총화(記聞叢話)의 작품 번호 274번 등 여러 야사 집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포천에 살던 윤필병은 한양의 시장으로 가는 소를 타고 동대문까지 왔는데, 성문이 열리지 않아 인근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술집 주인이 "당신이 혹시 오늘 과거 시험 보는 윤 씨가 아닙니까?“라고 묻는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더니, 술집 주인은 꿈에서 그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나무를 실은 소 등에 오색 빛이 나는 것이 함께 실려 들어오기에 그게 뭐냐고 물었습죠. 그랬더니 소 임자가 저것은 소의 새끼인데, 사실은 용이다. 시장에 팔려고 실어 왔다고 하더군요. 그 뒤에 꿈을 깨보니, 선비가 들어오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소의 새끼는 한문으로 '축'(丑)에 꼬리가 달린 형상인 '윤'(尹)을 뜻하고, 용이라는 것은 등용문(登龍門)을 의미하니 과거시험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다. 술집 주인의 꿈에서 이미 그의 과거 합격 통보를 받은 셈이었다.

 

디지털포천문화대전에도 이 내용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송이중신은귀근포천'(送彛仲新恩歸覲抱川)은 조선 후기의 문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윤필병이 과거에 합격하고 경기도 포천으로 귀향하는 것을 환송하며 지은 한시다. 이는 석북집(石北集) 권 8에 수록된 유명한 작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윤필병이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데 전설 같은 야사가 전해오고, 급제하여 귀향하는데 선배 한 분이 멋진 한시를 지어주는 모습이었다. 

 

 

윤필병은 이후 지평을 역임하고 장연 현감이 되었다. 여기서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고, 이속(吏屬)들은 엄하게 다루는 한편 사민(士民)들에게 학습을 권장하니, 문풍(文風,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떨치고 치적이 현저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1778년(정조 2) 장령으로 상소해 붕당의 혁파 등 4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1786년에는 다시 임금이 친히 참석하는 춘당대(春塘臺)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해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첨지중추부사, 병조참지, 안악군수, 좌승지(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정삼품 벼슬)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1792년(정조 16) 7월부터 1795년(정조 19) 3월까지 약 3년간 동래부사로 재직하면서 병기와 성첩(城堞)을 수선하고, 군사의 조련에 힘쓰면서 읍민 자제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쳤다. 특히,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과감하게 구휼 사업을 벌인 결과 재임이 끝난 뒤 바로 1795년에 거사비(去思碑,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와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을 때부터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세워졌다.

 

1798년(정조 22) 무오년 12월 14일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除授,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되었다. 1799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대신(臺臣)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고 조정이 일변해, 이듬해 당국자들이 신유사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일망타진하려 하므로, 호군의 직책으로 100여 명을 거느리고 척사소를 두 번이나 올렸다.

 

또한, 서학을 배척해 1802년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가족을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행동으로 파직, 문외출송 되어 서울을 떠나 포천으로 돌아와 이익운(李益運, 1748~1817)과 더불어 시를 창화(唱和)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정조와 성시전도시,

그리고 윤필병과의 관계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최병구)은 2024년 12월 13일부터 2025년 3월 9일까지 서울역사문화특별전 '태평계태평(太平繼太平) : 태평성대로 기억된 18세기 서울'을 개최하였다. 역사적 중흥기로 평가되는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에 주목하는 전시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태평성대를 꿈꾸며, 한양의 도시 풍경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낸 ‘성시전도(城市全圖)’ 관련 유물 등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 200건 310점을 선보였다

 

이 전시의 도록에 담겨있는 이슬찬(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 님의 글 '기록을 통해 살펴보는 성시전도(城市全圖)의 제작과 평가'는 가장 최신 정보를 담고 있어, 이를 근거로 성시전도시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1792년(정조 16년) 어느 날, 정조는 규장각 차비대령 화원들에게 한양의 도시 풍경을 담은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게 하고, 같은 해 4월 24일에 이를 주제로 하여 초계문신과 검서관, 입직한 신하 총 33명에게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압운으로 7언백운고시(七言百韻古詩)를 지어 3일 후인 27일 묘시(卯時, 오전 5~7시)까지 제출하라는 시험을 쳤다.

 

여기에서 ‘성시(城市)’는 성으로 둘러싸인 시가지, 즉, 한양성으로 이렇게 완성된 글과 그림은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담아냈을 뿐 아니라, ‘어진 임금이 다스려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상과 바람이 담겨있으며, ‘성시전도’는 18세기 서울의 도시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상당히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 정조는 신하들이 지어서 올린 성시전도시를 직접 심사했는데, 여기에서 병조정랑 신광하(申光河, 1729~1796, 석북 신광수의 동생)는 다음의 표 1과 같이 ‘이하일 二下一’의 점수로 장원을 했다. 한편, 그의 친필 시권은 이번 전시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2등은 박제가, 3등은 이만수이며, 윤필병, 이덕무와 유득공은 삼상(三上)으로 공동 4등을 하였다. 정조는 1등에서 4등까지 6편의 시에 대해서는 직접 평(어평, 御評)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표 1에 정리하였다.

 

지금까지 '성시전도시'는 이덕무, 박제가, 신광하, 서유구, 이만수, 유득공, 신택권, 이학규, 신관호, 정동간, 이희갑, 김희순, 이집두 등 모두 13인의 작품이 알려져 있고, 이 도록의 말미에 성균관대학교의 안대회 교수가 형태가 다른 작품을 포함하여 2인의 작품을 추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표 1, 응제 ‘성시전도’에 참여하여 어평을 받은 6인의 입직 제신 

 

신광하의 성시전도시는 역사성과 의고성이 강한 작품으로 18세기 한양을 중국의 옛 제도와 연관시켜 고풍스럽고 정중한 태도로 정조의 치세를 찬미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박제가는 솔직한 도시의 풍경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정조의 어평을 받은 최상위 6인 중 윤필병의 성시전도시만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윤필병의 문집 '무호암집'(無號菴集)의 발견

 

 

파평 윤씨 판서공(휘 세징)파 종중에서는 지난 2024년 중반부터 23세 윤세징 이하 직계 조상들의 의미 있는 문화재들을 발굴하고 보전하려는 노력 중에 종중회장인 윤경환 교수의 사가에서 윤필병의 문집인 9권 6책으로 이루어진 '무호암집'(無號菴集)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 문집은 현재 한시 전문가들에 의해 진본인지 여부와 학술 가치에 대해 검증하는 과정에 있다.

 

확실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표 1에서 알 수 없었던 윤필병의 성시전도시가 1권의 목차에 실려 있으며, 성시전도시의 내용 전문이 필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성시전도시 이후에 바로 치러진 어고(御考) '금강일만이천봉' 등의 원문도 실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경환 교수는 지난 19일 종중의 학술조사 중간 보고회 자리를 빌려 무호암집의 존재를 포천시 향토 문화재 담당자, 일반 대중 및 매체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이며, 동래부사로 선치를 하셨고 당시 뛰어난 시인으로도 유명했던 호조참판까지 지낸 윤필병은 그의 문집 자체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포천이 낳은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문집이 발견되어 그 안에 있는 수준 높은 많은 한시와 다른 작품들에 대해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전 호조참판 윤필병의 존재와 함께 그의 문집 '무호암집'도 우리 포천시의 자랑스러운 “보석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종중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화하려면 앞으로 포천시의 큰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저작권자 ©포천좋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포천좋은신문 | 주소 : 경기 포천시 포천로 1618, 2층(신읍동) 발행인 : 김승태 | 편집인 : 김승태 | 전화번호 : 010-3750-0077 | 이메일 : pcgoodnews@daum.net | 등록번호 : 경기,아52593 | 등록일 : 2020.07.02 저작권자 ©포천좋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